::나무와함께

103-이종문, 묵 값은 내가 낼게

나무에게 2019. 1. 15. 12:28

 

 

 

묵 값은 내가 낼게 / 이종문



   그해 가을 그 묵 집에서 그 귀여운 여학생이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 둘을 
   냠냠냠 씹어보는 양 시늉 짓다 말을 했네
  
   저 만약 출세를 해 제 손으로 돈을 벌면 
   선생님 팔짱 끼고 경포대를 한 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보면서…… 묵을 먹을 거예요
  
   내 겨우 입을 벌려 아내에게 허락 받고 
   팔짱 낄 만반 준비 다 갖춘 지 오래인데 
   그녀는 졸업을 한 뒤 소식을 뚝, 끊고 있네
  
   도대체 그 출세란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출세를 아직도 못했나 보네 
   공연히 가슴이 아프네, 부디 빨리 출세하게
  
   그런데, 여보게나, 경포대를 도는 일에 
   왜 하필 그 어려운 출세를 꼭 해야 하나 
   출세를 못해도 돌자, 묵 값은 내가 낼게

 

[온형근의 詩視時]

 

묵밥을 좋아한다. 가끔 그 고소한 맛으로 고독의 속성을 발견하곤 했다. 제천 중앙시장에는 올챙이묵도 팔았다. 내 기억의 이미지는 모두 40년 전의 풍경이다. 그러니 그 모습은 현장에서 사라진다. 온전히 내 상상의 제천에서만 노숙한다. 노숙도 40년이 지나니 숙성되어 출세는 무슨, 그냥 묵밥이라도 걷어차였으면 했다. 그래서 귀한 음식이 되어 알현이 어려워졌나보다. 출세 못한 게 묵밥 한 그릇 치울 수 없을 정도로 기막힌 건 아니잖아. 묵밥을 잊었겠지. 현란한 새로운 음식에 치여 차마 그리운 어머니의 묵밥, 올챙이묵은 잊혀진 게 분명하다. 아니면 세상에 치여 그리움마저 팔장 끼기 힘든 잔뜩 물먹은 무게로 지탱이 어려워진 게다. 여보게, 오늘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도 묵밥을 먹을 수 있는지 살펴보게. 내 이따 거기로 가서 古都의 또다른 고독을 묵밥에게서 한 수 얻을까 하네.

 

(2019. 1. 15. 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