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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들어서고 막아서는 숲길

by 나무에게 2013. 12. 24.

 

 

 

2004.11.07


그림자 들어서고 막아서는 숲길


-생각하여짐과 보여지는 것과의 주고받음

늘 같은 숲길이지만 새벽산행은 간단하다. 어쩌다 종일 시간이 산으로 뻗치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의 종일산행은 긴장을 하여야 한다. 삼삼오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산이야말로 현대에 보기 드문 평등을 지녔다는 생각을 한다. 관대하고 포용적인 산의 위상을 본다. 산이 그런 것인지, 사람이 평등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산은 다양한 모습과 행태로 가득하다. 새벽산행은 그냥 나서서 어둠 속에서 어둠이 걷어지는 동안, 홀로의 사색을 위해 유익하다. 그러나 종일산행을 하는 날의 생각하여짐은 보다 대중적이고 현실적이다. 산만하다.


종일산행을 하는 날은 허기짐이라는 복병을 만난다. 평상시 배고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일상화되어 산책처럼 나서고 시작한다. 그리고는 속수무책을 만난다. 어쩌지 못하는 현실적인 상황에 처하고 만다. 준비 못한 자책은 내적으로 강한 인내 또는 의지를 부여한다. 이때 찾아 들어서는 것이 숲에서의 그림자다. 보여지는 숲길은 다양한 그림자로 드리우며 막아선다. 가장 많은 것이 구멍난 그림자이다. 숲길의 산책에서 노래가 들린다. 이 또한 형형색색이다. '구멍난 그림자'라는 노래와 숲길에서 보여지는 '구멍난 그림자'는 분위기와 내용이 다르다.


그림자가 자주 찾는 곳은 아직 봄비에 녹지 않아 질긴 눈이 잔존해 있다. 햇살이 그림자 중간 곳곳에 끼어 구멍이 되어 있다. 그림자가 아득한 햇살 살집을 헤집고 끼어 상처를 아물게 한다. 가죽이 벗겨지도록 물렁하게 짓물려 있는 길은 자주 미끄러진다. 하지만 아직도 견고하다. 얼음길인 겨울의 의지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멀리 바라보는 숲은 이미 봄기운 가득하다. 눈을 내밀고 있는 은밀함들 도처에 실려있다. 겨울가지와 봄가지의 색 중간에 미세한 떨림으로 머물고 있다. 이 또한 분명한 색을 지녔다. 봄색이다.


숲길의 풍경으로 깡마른 리기다소나무를 바라보면서 <김왕노>시인의 근작시를 생각한다.


리기다소나무 (김왕노)


미국 삼엽송 삼엽송 세잎 소나무라는 리기다소나무
리기다 리기다 리기다 리기다 리기다 그러나 자꾸 일본 냄새 나
잘려져 누워있으면서도 여기저기 몸뚱이에서 돋아나는 잎들
그 시퍼런 생명력이 자꾸 두려워 져
리기다 리기다 리기다 리기다 리기다 하며
아직도 식민의 꿈이 자꾸 돋아나는 것 같아


잘라져도 새싹이 튀어나오는 리기다소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시인은 두려움을 느낀다. 경기도 근처의 숲에는 리기다소나무 투성이다. 한때 소나무에 솔잎혹파리가 극성을 부려, 당시 농민운동의 선구자였던 서울대학교의 유달영 선생이 리기다소나무를 심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다. 그리고 고향인 이천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에 가장 많이 심겨졌다. 관리가 안된 나무들은 가늘고 관리가 된 나무들은 제법 모양이 나고 있다. 종로타워 건물 옆 우거진 숲의 표현이 리기다소나무다. 리기다소나무는 서울의 명망 있는 오피스빌딩 주변 조경으로 식재 되어 있다. 나무 개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조경 된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나무로 인식되는 군식의 기법으로 응용 식재 되었다. 그 아래는 회양목 융단을 두르고 있다.


가장 흔하게 보는 나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보여지는 숲인 도시의 조경과 사색과 산책을 주는 산에서의 숲길은 다르다. 산책의 숲길은 햇살과 그림자의 관계가 있다. 햇살이 나무의 종류를 피하거나 선택하여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봄이 이르게 찾는 듯 하다. 흙살이 푹신하다. 무른 흙살에서 온 몸으로 움찔하며 이어지는 천지와의 울림이 있다. 계절을 예비하고 있다. 생명이 무자비하게 돋아나는 봄이다. 막무가내의 에너지가 솟아나는 봄 말이다. 이런 봄기운이 숲길에서 사람을 지치게 하나 보다. 다리도 풀리고 어깨도 처진다.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걷다보니 보여지는 것들 또한 실한 그림자다.


그림자가 들어섰나 보다, 그림자가 나섰나 보다. 하면서 걷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아주 더디게 드물게 출몰한다. 준비하지 않고 떠난 숲길을 톡톡히 혼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좋다. 나를 격려하며 숲길을 나선 그림자가 있다. 여기 저기 구멍난 그림자를 보면서 숲길의 또 다른 맛을 지닌다. 같은 산을 다니더라도 매번 코스를 달리해야 제 맛이라던 선배의 말이 귀를 맴돈다. 힘이 빠져 있었는지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똑같은 코스라도 보는 것이 다르면 맛난 것이라고 말이다. 음식 공양을 받을 때 늘 부처를 대하듯 정성을 다하라 한다. 숲길 역시 온 정성을 다하여 대한다면 그림자도 조화를 부려 예쁘게 보인다. 맛있는 풍경이 되어 허기짐이 가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