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467 고욤의 상상력 고욤의 상상력 온형근 무게 지닌 것들은 잽싸게 빈자리로 가지 뻗은 거리만큼 날며 떨어진다 낙엽은 휘둘려 고욤을 덮는다 그 집 안에서 생명은 오순도순 앉은걸음으로 종종거린다 이 아침의 생기는까맣게 얼었다 풀리기를 되풀이하는 틀어 앉은 아침 햇살에눈부신 고욤이 장가가는 잔치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꽃나들이 꽃나들이온형근 데이지, 마거리트? 진달래 꽃얼굴로 연초록 새잎 삐죽 목련 꽃잎 몇 장에게 툭툭 뱉어내는 잎새 샐쭉거리는 짙은 그리움 내리찍고 있는 시선 작설雀舌이고픈 허망한 세월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비로소 내가 이뤄 낸 계곡은 서늘하다 비로소 내가 이뤄 낸 계곡은 서늘하다온형근 비 그치는 광교산에 올랐다 아직 차기만 한 그 계곡에 물이 불어 있을 것을 입구는 유난히 커진 관목들로 가려져 헤쳤으나 불어난 물 깊어진 바닥을 차고 나가기에 산자락 팔뚝 굵기 가지들에 급경사를 정성껏 돌아 온몸 떨리라고 흔들며 오르는데 땀방울이 벌레 기듯 스멀거린다 꽉 막힌 순환이 숲 기운을 섭생으로 모신다 큰산에서는 각각의 작은 골로 물들이 모여든다 물은 무게를 얻고 속도를 내며 더 낮은 골로 이른다 낮은 골들은 서로 이끌려 내를 흉내낸다 뒤엉켜 기어코 터져 울고 마는 물소리를 낸다 비로소 내가 이뤄 낸 계곡은 서늘하다 계곡은 이리 꺾이고 저리 부딪히며 가끔 바위를 만나 틀어나가다 폭포를 지닌다 폭포에 이르는 길은 슬쩍 바람이..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우전 또는 작설 우전 또는 작설온형근 오른쪽 발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왼쪽 무릎 안쪽으로 집어넣는다 허리를 쭉 펴고 손바닥 노궁을 아래로 잠시 뻗어나가는 기운을 감지한다 우전을 마실 때처럼 자르르 짜르르 질러 나가거나 퍼질러 앉는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좌에 들자마자 입안이 달다 불빛이 펄럭인다 그 사이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근사하게 자리한다 나는 느티나무 근처에 둥둥 떠 있다 정좌하고 있는 느티나무로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떤다 점점 더 빠르게 나뭇잎이 일렁인다 숱하게 많은 나뭇잎에 내가 앉아 있다 정좌한 느티나무가 점점 멀어진다 내가 나뭇잎으로 점점이 박혀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다 우전 또는 작설만 남아 혀를 간질인다 휴우, 어느새 나는 없다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잠결, 대금 소리에 깨어 잠결, 대금 소리에 깨어온형근 마치 멀고 긴 여정을 풀어놓아야 하는 심정으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피리라고 했지만 그 소리가 대금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었지요 잠결이었으나 잠은 파한 것이고 대금은 깨어 있었지요 호흡이 멀고 길게 빠져나갈 때쯤에야 소리의 파동 안에 높낮이가 절묘하게 스며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낮으면서 단호하게 내쉬고 들여 쉴 때와 뱉어내고 빨아들일 때 그 속에서 혼자 생성되고 흥하고 소멸하는 호흡은 숨 멈춤이었지요 숨어 있다가 멈추었다가 춤을 추는 것이었지요 나중에는 대금은 없고 긴장 팽팽한 숨 멈춤만 남더라고요 대금 높낮이는 숨멈춤을 그리워하다가 절절해지고 숨 멈춤은 저 혼자 멋대로 우주를 휘젓고 있더라고요 대금 높낮이의 파편을 부드럽게 휘감고서야 소리와 침묵이 호흡과 정지가..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해금 연주 해금 연주온형근 그가 그리움의 길목을 지나쳤다 생각하는 순간 불면으로 좌회전하는 자신을 놓치고 만다 일찌감치 똬리를 튼 해금에 일별한 후 가볍게 가슴을 흔든다 그의 폐는 구멍이 뚫린 게 분명하다 바람이 들락거릴 때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떤다 소리는 공허한 야밤의 정취를 흔들며 해금을 뜯듯 시작과 끝을 풀어낸다 기침이 폐의 구멍을 건드린다 해금에 갇힌 채 혜진 몸을 공중부양으로 내몬다 그의 불명은 떴다 가라앉는 지랄로 저 혼자 열리고 닫힌다 잠시 꿈결에 잠길 틈도 없이 바닥에 꽂힌다 또 얼마나 긴 일상의 우물을 퍼 올려야 하니 여기저기 매듭 엉킨 실타래일까 해금에 서성대며 달라붙는다고 그래서 기침할 때 마다 몸이 공중으로 덨다 가라앉는다는 하나의 순환에만 정신을 모은다 자신은 울울하다고 조각난 기침이..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낮달 낮달온형근 득달이랄 수 없이 오르는 산행 길일행에서 한참을 숨 고르며 흐트러지지 않았다앞설 수 있기 바란게 아니라 일정한 보폭과 호흡으로진득하여 마음이 나무나 바람이나 바위처럼 그저 그러할 때일행에서 한참을 벗어나 앞서 나가던 나는나무나 바람이나 바위를 닮아 있었나 보다 내 앞 언덕 높은 곳에서 내리깔리는 목소리"얘!"짧고 단호하면서 은근하여 낮은 소리였다두 사람이 내려오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겠는데한 사람이 앞서고한 사람이 뒤처져 내려오는 뭐 그런 흔한 산행 모습그러려니, 치부할 것조차 없이 그저 그렇게그 언덕을 같은 보폭과 숨결로 오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뒤처진 사람이 산등성 한쪽으로 급하게 틀어 나가는데글쎄 어느새 바지를 내리고 낮달처럼 동그랗게 나무숲 사이를 환하게 한다거참,"얘!"는 그래서..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솟대 무늬 박달나무 차탁 솟대 무늬 박달나무 차탁온형근 주머니에서 찻잔을 꺼낸다 학 무늬가 그려진 청자다 위는 넓게 퍼져 얇고 아래로 좁아지면서 도톰하다 잔 아래 지름은 잔 높이와 비슷하고 잔 위 지름의 절반아 가찹다 박달나무 차탁을 꺼낸다 세로가 조금 길다 두툼한 두께는 엄지의 너비만 하다 앞면에 솟대가 여백을 바탕으로 비구상으로 깎아져 들판에 세워져 있다 박달나무 곳곳에 검은색 금이 박혀 있다 살아 있던 박달나무가 되돌아가는 곳은 묵직함이다 나무는 간 곳 없고 단단하여 점잖은 무게만 되살아 겨울 들판을 지켜낸다 솟대가 비틀거린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갔다 겨울비가 스쳤다 몸을 움츠렸던 솟대가 벌떡 일어난다 찻잔이 넘친다 젖어 있는 들판으로 그녀가 지나간다 따뜻하여진 잔에서 하얀 학 한 마리가 퍼덕이다 젖어 있는 들판을 훔친..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국악꽃향기 국악꽃향기온형근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의 월요일 파문을 시작으로 문을 연다 익숙한 소리다 눈과 귀가 호사를 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백회가 뜨거워진다 용천과 노궁까지 삼문을 연다 혀를 입천장에 말아 넣는다 대금의 헛헛한 숨결 빠지는 소리가 파문의 긴장과 맞물려 입에서도 출구 없는 입김이 새어 나온다 눈을 감는다 마시고 내쉰다 소주천을 돌린다고 여겼다 다시 산행으로 이어진다 초원에서 귀소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삼포 가는 길에서 잠시 눈을 뜬다 썩 만족스러운 수련이다 입안의 옥액을 세 번씩 돌려 세 번에 나눠 삼킨다 그렇게 세 번을 한다 듣기에 편하다 나는 새는 한 가지의 나무에서도 편하다는 일지암이 실내악으로 연주된다 바위틈 옹달샘 물소리 찻물 끓이는 소리 도반들의 기장이 가득 펼쳐진다 두륜산이다 노래를 ..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가리파재 가리파재온형근 어렸을 적 자전거로 넘었다고 자랑하던 친구, 반짝거리며 빛나던 이이스스케이트 선수의 건각建脚이 치악산 금대리와 성남리 중간쯤 가리파재에 푸담하다 한참을 서성여도 될 이끌림 육산肉山으로 이어지는 산행길로 고개 들면 앞산이 가찹다 돌아보면 소나무, 잣나무의 늘씬한 나무꼭대기들이 밭을 이룬다 두어 시간 치고 올라야 산나물을 캘 수 있다는데 한 시간 정도에서 너른 병풍 닮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빌길에 채이는 둥글레, 잔대, 참취, 나물취, 곰취, 참나물, 고사리, 당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아 볼 수 없는 것들은 숲을 이룬다 겨우 참나물 하나를 구별한다 내려가면서 짓밟히고 올라오면서 긁히는 것들 다신 산나물 캐러 오지 않겠노라는 생각에 참나물마저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찔레꽃무덤 찔레꽃무덤온형근 그에게 야트막한 산 하나 선물한다 하얀 찔레꽃무덤 여기저기 뭉쳐나는 것들 한때가 있다고 강렬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흩뿌려진다 이 골 저 골 세상에 비릿한 것들 투성이라고 마구 어지러운 햇살을 더한 채 맑기만 하다 꽃도 무덤을 이루면 단정해져 찔레는 깊고 고른 숨을 나눈다 그들끼리도 소통이 깊어 향기는 날려서 빼고 자태는 곱게 떨구어 내고 연한 가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가끔 날카로운 숨을 내쉰다 그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져 허튼수작은 꿈결이라며 노란 꽃술에 묻혀 질기다 무덤은 제각각 포물선을 긋는다 벌과 나비가 저만큼씩 주르륵 미끄러진다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사랑의 잔해 사랑의 잔해온형근 팍팍해진 목질부로 흰개미들이 우글거린다 한때 윤기로 넘치던 형성층은 바짝 마른 소리 메마른 바람소리를 흉내 낸다 마른 잎은 숨죽이고 그 거친 날숨 앞에 고요하다가 살아 있다고 아직 보시할 몸뚱이가 있다고 흰개미가 득실글대며 왁자하다 그럴 듯하다고 부드럽던 윤활의 시절이 근처였지 않았던가 솜구멍처럼 커진 섬유질 사이로 허한 바람만 들락거린다 습윤의 바람이 몰아친다 더러 빗방울까지 침투하고 있다 안개비에 젖을 때마다 흰개미는 떼를 이루어 찾는다 육신에 비가 내릴 때마다 송송 뚫린 구멍으로 되찾을 수 없는 가을이 새카맣게 그을린다 언제 윤기 탱탱한 시절의 안타까움이 있었던가 이미 잔해로 흔적을 바꾼 나뭇가지들은 문드러져 내맡겨 있다 부지런한 발걸음도 숲에서는 햇살을 가라지 못한다 어제.. ::시집::/고라니고속도로 2026. 9. 2. 이전 1 2 3 4 ··· 1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