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496 달빛과 소나무 달빛과 소나무 온형근 1.달빛 쏘인 소나무 그림자는 굵고 가늘고 진하고 여리고 흐려지는 순간에 속살을 내놓는다 2.서로 만나 명징한 평행선을 긋거나 가슴을 후벼 파며 언 냇물에 포갠다 3.사람 없는 차디찬 고요를 달빛 죄었다 풀며 받아들인다 솔바람 소리 4.겨울 마른 숲 사이로 달빛은 찬란했다 5.언덕 너머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달빛 따라 고개를 느리게 젖힌다 6.눈치챌 수 없게 바람은 풀잎 한꺼번에 일어서라고 발뒤꿈치 들어 올린다 7.잠시 먹통처럼 막막하더니 달빛 닿는 곳으로 눈길을 거둔다 8.다시 나온 달빛이 나뭇가지를 후두두 꿰뚫며 흔들어댄다 9.구멍 송송한 소나무의 관절이 스멀스멀 비틀어지며 맞춰진다 10.달빛에 소나무 굽은 허리가 휘영청 바로 펴진다.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첫눈의 무게 첫눈의 무게온형근 흰 눈이 내릴 때 찻물은 녹아내리고제주 감귤은 시고 시어서마음이 아프다고 환장하겠다고깨진 차관의 손잡이로 되돌아온다 비리고 시린 삶을 슬쩍 숨겨 주는 첫눈에게 누가 울지 이 고요함 내 마음에 당신의 달이 깊어신음으로 얼굴이 기침하는데당신의 흔적들이 커다랗게 부풀어첫눈처럼 삼켜져 눅눅해지는데 환한 눈빛에 쏘여 달은 은은해지고당신의 기별로 달자국이 찍혔는데이 깊은 산골 한 눈에 반한 첫눈이어요 첫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어깨 통증이 아래로 쏟아지더니 팔 중간에 멈춰 밤새 괴롭히더라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와 왼쪽으로 돌아누워도 오른쪽으로 돌아누워도 냉기들이 온몸을 감아내더라 밤새 안녕? 첫눈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밤안개 도벌盜伐 밤안개 도벌盜伐 온형근 나 아직 그대 밤길에 머물러 깊어져 있는데 송골송골한 눈망울 두고 떠나왔는데 아무런 힘도 남지 않아 소리조차 다가갈 수 없고 아른아른 겨울 밤안개로 얼씬거리고 있고 밤늦은 나는 그대라 부르는 산을 오르고 토막 난 나무는 얼추 누군가 전망을 밝히지 못하는 숲이라고 손가락질하였거나 톱을 가지고 다니며 자른 것이거나 벌집 쑤신 듯 그대를 헤벌려놓았겠다 잘라진 나무는 도시의 불빛을 가리지 못하고 기댄 채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진을 친다 바짝 고개를 내민 작은 솔잎들 아직 싱싱하게 매달려 제 죽음을 거부하는 울분으로 돌아눕는다 밤안개에 홀린 건 수풀 사이 흔들리는 바람 깊게 파인 그림자를 새기다 발목이 꺾이면서부터다 숲으로 난 창문으로 신갈나무 메마른 잎 털썩 떨어지더니 밤안개 신기루처럼..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온형근 넘쳐 난 계곡물 가라앉을 때쯤물푸레나무 잎새에서 푸른 색소가 자랄 테지 처음에는 뿜어낼 줄 몰라퍼질러 곳곳으로 흩어졌다가검은등뻐꾸기 찾아와 한참을 앉아 있을 때쯤아랫녘에서 치밀어 오른 바람이 뜨거워질 때쯤 숨 벅찬 상처주변 나무들에게 나누질 못해바짝 잎새를 조일 텐데 젖은 기운 잎맥으로 몰려 마른 잎새 물드는데통통한 잎자루로 착한 시선 잔뜩 모아눈매 시원해지는데 맑아진 계곡물 흙탕물 걸러낸 곳으로아픈 상처 자주 떨구는 고개손끝만 닿아도 툭 터져 쏟아낼 뭉침 저러다터진 수액으로 당신의 무른 살점 비집고푸른 상처로 몇 날 밤을 아파 잠 못 이루고 맑은 계곡 모두 새파래져씻어내려면 또 몇 차례 비 쏟아져야 할지저 빗속에서 목청 터지라 함께 소리 질러야 할지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숲의 기원 숲의 기원온형근 그녀와 헤어진 숲은 고요하여가슴 허전한 산길의 모퉁이를 삼킨다어깨로 흐르는 들뜸이나발끝으로 전해지는 아득한 울렁거림까지도 짐짓 모른 채 이미 그녀는 고요에 길들여져 울면서 소리 지른다그래 속으로 풀어지는 것이라고나무 한 그루씩 다가서서는 속내를 가다듬고 껴안는다 그녀의 속삭임에 숲의 모공 일어나곳곳 막혀 범벅이던 수액의 바람길큰 바람 작은 바람 시원하게 풀린다큰길 오솔길에 풀잎처럼 흔들린다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바위늪구비 습지 바위늪구비 습지온형근 갯버들이 만들어내는 연초록 뭉게구름물 가장자리로 그어진 연한 곡선의 잔치누구네 집이 더 예쁜지 가려내기 어려운관목 숲 사이로 새들의 둥지가천연덕스럽게 물가를 가로지르며 유영하는오리 떼의 날개는 반짝이는 윤기로 가득했고굽이굽이 유선형을 그려내는 곡예 발바닥에서 발원하는 가슴 벅찬 생명의 기운손바닥으로 따뜻함 저절로 돌아 정수리를 휘도는아주 긴 들이마심과 내쉼이서로 어우러지는바위늪구비에서 오래된 머무름 바위늪구비 -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일원의 남한강 유역에 위치한 습지로 산과 강을 품고 있다. 4대 강 개발로 사라짐.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그림꽃 국화 그림꽃 국화온형근 노란꽃 보라꽃 묵으로 친 바위꽃을 탐하는 잠자리와 어린 고양이분홍 국화 위로 비행하는 기러기바위의 세월에서 목청 높이는 장닭에억새 늘어진 들국화 환장하고가을 소나무 보랏빛 들국화로 고개 늘어뜨린다느릿느릿 게 두 마리 대밭 앞 황국으로 숨고커다란 꽃 아래 늙은 호박 햇살에 빛나구절초와 억새로 처진 냇가에 두루미 노닌다 비파 앞 묵국이 고개를 내밀고화분에 심긴 국화 하나 마음에 심고새 한 마리 날자 기댈 곳 없이 쓸쓸해진 장독대 화려하게 둘러싸는 국화로 둘러싸여우주의 마지막 기운으로 한 겨울을 인내하라고쥐어진 손바닥 안에서 저절로 따뜻해진다.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안압지 - 동궁과 월지 안압지 - 동궁과 월지온형근 따스함 아직 넘기지 못하여 어둑한 어깃장 그늘진 햇살로 반쯤 열린 반가움 걸쳤는데 낙엽의 흩날림으로 무릎덮는 온기 저 산 정념 하나 그예 떠다밀고는 시치미를 떼니 흐려진 깊이로 들쑥날쑥 길모퉁이로 자취 감추고 이른 새벽 월지 굳게 닫힌 문살 틈 기러기와 오리는 다시 올 기약만으로 가을 맛 적신다 마른 연못 반짝이는 화강암 다 좋으라고 그저 좋아하라고 웃다가 보면 늘 헛헛한 바람 빠지는 고무풍선 애써 아니라고 가슴 통째로 비우거나 채웠을 때 둥근 달 한 귀퉁이 퍼런 반점 번지는 새벽 귀가 얼굴 표면 차갑게 스치는 솔바람 사이로 떨면서 다가오는 겨우내 품고 살아야 할 햇살 갑자기 눈부시게 속속 들이찬다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그녀의 해금 그녀의 해금온형근 `마르지 않는 강´ 불노하不老河*를 듣는다 잔잔하다 울컥 치미는 장엄함 이국에서 멀리 조국을 향해 울부짖듯 곡진한 음률이 가슴을 저민다 그러면서 빠르게 떠는 새로운 장정의 예고파도가 넘나드는 힘찬 저울질마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느린 개울 흐름으로 강이 되는 기운 실같이 가느다란 음률을 이어내는 고요함안으로 굳어가는 부름켜를 버리고 바깥 부름켜를 새로 만드는끊임없는 순환으로 퍼 올리는 우물그래서 제 율동만으로 모래를 적시고 자갈 어루만지는 스밈과 들춤고여 있더니 다시 흐르는데 흔적 없이 심연에서 흠뻑 젖었다마르지 않는 것은 그녀의 해금뿐 입 안이 헐었다 바싹 말라버린 혀 축이려 애쓴다마른다는 것은 늙는다는 말인가 말라죽은 나무는 마지막 수액을 자신에게 깃든 숱한 애벌레와 곤충에게 정성..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혜초 혜초온형근 혜초의 마른 발바닥 그림자를 더듬다가목마른 한 다발의 물기로 들락대다가 지금 사막인가요 어서 오라고 하지 않았더라면지금쯤 거리를 나서지 않았을지 몰라요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산중인지 들판인지모두 자글자글 끓여내 불꽃이라고 부를래요 사막의 모래섬에 갇혔을 때 모래 귀신에게 어찌하여 홀렸는지 그림자여 나는 알 수 없어요일렁이는 모래를 사막이라고 생각하였는지오래된 천축국이 어찌 내게 끈이 되어 다가오는지훌쩍 걷기로 맹세한 지금 사막인가요걷다 쓰러지면 내 뼈도 모래가 될 수 있을까요.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종묘 종묘온형근 왜 그 눈망울이 슬픈 모양새를 갖추었는지주름진 이마는 그렇다 치고눈주름으로 골 지어 흐르는 슬픔을거두어들일 수 있는 게 지상에 있을까마를 대로 말라 주름조차 비어 펴진 채긴 여행 끝 공허한 눈매 따라나선 그리움을 조금 더 기다리고 참으면 자유로워진다고 보따리 모두 풀어놓고 너스레를 섞어살면서 그렇게 흉한 놈세상에 그렇도록 옥죄는 놈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이 말을 나눌 수 있다고왜 그 눈망울은 그리도 슬픔에 젖어있는지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억새밭 억새밭온형근 기어코 저 억새밭흔들리는 길목 한복판에새도 앉지 못하는 한나절에 이른다눈부신 빛의 발산에바람마저 머뭇대며맴돌다 그쯤에서 소용돌이지긋이 딴청부리는 한낮의 억새밭으로지난 가을은 지고 말았는데억새끼리 부딪쳐 내는 소리에햇살로 아찔한 저 억새밭 사이에그대의 가을이 피어나니저만치 물러앉아 기다린다는 말은내 그대를 일정 부분 찾지 않겠다는바람 일렁이는 가을 들판에억새 두런거리는 속삭임이다. ::시집::/천년의숲에서있었네 2026. 9. 7. 이전 1 2 3 4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