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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가락 3수 노랫가락 3수 온형근 바람이 물 소린가 물 소리 바람인가 석벽에 달린 노송 움츠리고 춤을 추네 백운이 허위적거리고 창천에서 내리더라사랑도 거짓말이요 임이 날 위함도 또 거짓말 꿈에 와서 보인다 하니 그것도 역시 못 믿겠구료 날같이 잠 못 이루면 꿈인들 어이 꿀수 있나그리워 애닯아도 부디 오지 마옵소서 만나서 아픈 가슴 상사보다 더 하오니 나 혼자 기다리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리라 애닯을 게 무어 있을까 서러움이 그렇게 자리 잡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봐야겠다고 기어코 오른 산길 내려 올 때 부디 오지 마라 메아리로 울리는 것을 어화 둥둥 들떴다가 에야 디야 서글픈 낙조 다음이 없다는 데, 매번 다음이고야 마는 모두 헛 일 꽃이 피어 나를 벙글게 했다고 지는 꽃 말릴 수 없듯이 가는 것은 지듯 시.. 2024. 2. 25.
안개의 원림을 걷는다 안개의 원림을 걷는다온형근   믿음이라는 건 맡기는 일이다.   마음을 맡기는 거라서   어쩌면 처분을 기다리는    수동의 소극이 개입한다.   알아서 즉흥이어도 따르겠다는 자포자기    세상 맛 다 보았을 "날 잡아 잡숴!"   의지한다는 건 그래서   싹을 틔우지 않아야 한다.   애초에 의념을 떠 올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어디 그게 쉽게 설명이나 될까.   갈수록 더 무뎌지는 처분에 다다른    어찌하라고 나는 상관없으니   점점 소멸로 치닫는 신뢰의 두께감이   무중력의 내홍으로 가는중이어서 서운함은   내게 내재되어 소중한 순간에 맡겼던    그리움 같은 것을 거적이라 거추장스럽다 여긴다.   아닌 척하는 잔망스러움은 눈치를 찾고   이내 남사스러운 통증은 협착되어 천년의 한숨에 실린다. 2024. 2. 21.
기구대棄拘臺 기구대棄拘臺 - 금쇄동 원림. 02 온형근 마당이 있고 사랑방이었을 때 우리는 자꾸 떠나고 외면하고 멀어져 갈 때 못 견디게 혼자의 경계 틈바구니에 낀 채 겨우 구차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그러니 그를 버리겠다는 의지는 차별 두지 않겠다는 불차 석문을 통과 잠시 일단 쉬어야 하는 하휴이니 숨차서 머뭇대는 토끼의 눈과 마주한다. 발간 눈 주위에서 뿜어낸 환각 도리뱅뱅 발 디딘 바위에서 곧추서는 의분 을 비우려 했건마는 역부족 구차함을 버리는 높은 풍경에서 큰 숨 하나 2024.02.17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금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금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금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 금쇄동 원림. 01 온형근 고기가 없으면 살이 마를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마음이 비속해진다. .. 2024. 2. 18.
금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금으로 둘러싸인 안뜰에서 - 금쇄동 원림. 01 온형근 고기가 없으면 살이 마를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마음이 비속해진다. ** 내가 너를 얻을 때 딱 한 가지 이끌림이 푸른 하늘 떠도는 구름처럼 망연해졌지만 고기가 아니라 대나무여서 육신이야 어찌 되었든 너의 마음씀이고 마르고 찌는 현장보다는 비루해질까 곤궁했다. 내 지닌 모든 것 다 주어도 너 하나 지니려 지켜냈다. 금으로 두른 산성 안 아늑한 경사마다 서로 다투듯 피워내는 춘란 군락은 누구 기암괴석으로 물고 드는 계류는 지줄대고 가는 곳마다 천석泉石을 정신의 대나무로 만드는 대체 고칠 수 없는 고질병, 산수벽山水癖을 ** 無肉令人瘦。無竹令人俗 - 고산 윤선도의 『금쇄동기』에서 2024.02.15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무진정 .. 2024. 2. 17.
무진정 가야금 무진정 가야금 온형근 툇마루에 낙화음이 현으로 튕겨 밤공기로 빛이었다가 은하수로 흩어지는데 문창살로 파르르 떨며 몽환의 그림자는 가늘게 떨던 어깨선으로 흘러내리던 선율 ​ 영육이 꿈틀대며 두꺼운 산세에 살포시 무진정 뒷산 반향 업고 충노담으로 감긴다. 동정문 아래 바위의 군무를 왕버들로 가렸으니 영송정에서 떠나려는 친구 자꾸 올려본다. ​ 가고 오는 인사에 매달려 따스한 손잡고 다시 얻은 지금의 무진정 원림에 이끌려 참숯가루 터지는 날 말고도 다함없이 찾아 명징한 연두의 오류선생과 함께 막 피어 ​ 연두로 설레는 떨림 가득 담아 봄세 2024.02.14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성주사지 고운孤雲 비문 성주사지 고운孤雲 비문 성주사지 고운孤雲 비문 온형근 돌에 새긴 비문이 천년의 중력에.. 2024. 2. 15.
성주사지 고운孤雲 비문 성주사지 고운孤雲 비문 온형근 돌에 새긴 비문이 천년의 중력에도 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선명하다. 다만, 울먹울먹 몸에 맞지 않는 계절 옷은 탐색도 없이 근육과 살점을 두들겨 꼭 맞춤으로 비비고 평지에서 발원한 좌 둔부 엉치쯤 저린 통증은 조원동 원림 가파른 내원을 치고 오를 때 잦는다. 팔 다리로 깨지며 빗금 긋고 근육과 뼈로 새긴 내 몸의 비문 산책 강아지 전봇대 가로수 킁킁대듯 갈피를 잡는다더니 해설피 놓는다.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씩씩하게 살았노라 제 몸도 추스르지 못하면서 기운 빼더니 새긴 문장은 삐뚤고 삭아 탈락되고 한 칸 건너 읽다 보니 곡비哭婢도 난삽하다. 2024.02.03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사인암 사인암 사인암 온형근 청련암 출렁다리에서 나는, 금 긋듯.. 2024. 2. 14.
사인암 사인암 온형근 청련암 출렁다리에서 나는, 금 긋듯 가로로 세로로 차곡차곡 사인암 각진 마음 따라가며 슬쩍슬쩍 그어 나가는 동안 넋을 잃거나 허한 마음의 빈 줄 흔들리지 않았다. 사인암 꼭대기 떡하니 모신 우람한 바위 각진 근육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떠날 채비 무겁게 올라탄 저 심사가 사인암일 듯 대흥사 의병의 봉기를 닮아 꽉 쥔 주먹 앙다문 노기를 물 깊은 사선대 너른 물 마당에 푼다. 사선대 너럭바위 올곧게 층진 우람 위로 바람 일어 남조천 물결 낮은 파란 일고 황정산의 한숨과 수리봉의 날갯짓이 키운 사인암 암벽 틈새로 진흙 알갱이 딛고 소나무 세상의 풀 죽은 기개는 잊으라고 맑은 초록으로 한꺼번에 들고일어난다. 물도 암벽도 소나무도 새파랗다. 2024.01.31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2024. 2. 3.
겨울 산줄기 겨울 산줄기 온형근 산을 날지 않게 붙잡고 있는 건 나무들 초목의 뿌리가 흙산을 움켜쥔 채 촘촘한 중력의 빈틈을 감지 근모는 방향을 탐지하며 사방 기웃댄다. 흠칫 나설 때마다 헛기침 내면 지나간 뒷발자국마다 근력이 붙어 세근은 섬유처럼 서로를 잇고 감싼다. 잠깐의 허공 잃은 눈동자의 짧은 허함 을, 급하게 덮어 주려는 듯 불콰한 환부로 서둘러 밀려오는 아림 을, 저 산 어디쯤에서 보았다. 주삿바늘 찌른 용액의 유영처럼 아플 텐데 어느새 산의 골격 울퉁불퉁 나출근 되어 나무의 지상부를 뽐낼 때마다 오솔길 한 편으로 나앉아 쪼그린다. 날갯짓 지쳤을까 지나던 새 힐끗 쳐다보더니 시퍼런 제 길 나선다. 기웃대느라 소란스러운 땅속 근모의 아우성 우산에 떨어지는 물소리처럼 단정하다. 2024.02.02 - [::신.. 2024. 2. 2.
뾰드득 소란 뾰드득 소란 온형근 장독대와 담장에 오롯하게 올라앉았다. 피었다 지는 것들은 수북하다. 눈 내린 하얀 소복처럼 산비탈 첫 발자국 선명한 낙엽 족적은 전혀 미끄러지지 않게 그가 정성스레 올랐을 그 옆에 화인 찍듯 천수경 독경 흩날린다. 주고받을 대화는 숨고 화평한 안면 일그러진다. 매일 쌓인 울화 일시 허탕 치듯 날리라고 천길만길 홧덩어리 눈밭에 찍는다. 내딛는 미끄러움은 뽀드득 소란을 경배한다. 눈 쌓인 고요에도 감정은 일렁이고 부끄러운 속내는 끄집어내는 순간을 기다려 나락이다 2024.02.02 - [::신작시::/창작|생산] - 날궂이 파일 날궂이 파일 날궂이 파일 온형근 재잘재잘 창가로 빗소리 넘나 든다. 를, 황차를 우렸던가 모니터로 넘실대는 산행의 기억을 더듬었을 거라는 추측만 난무 내치는 심사.. 2024. 2. 2.
날궂이 파일 날궂이 파일 온형근 재잘재잘 창가로 빗소리 넘나 든다. 를, 황차를 우렸던가 모니터로 넘실대는 산행의 기억을 더듬었을 거라는 추측만 난무 내치는 심사를 어찌 움직여 우공이산을 이루겠는가 싶어 술 걸러 날궂이 파일을 들여다보는 지극한 현묘지도玄妙之道에 흠뻑 스민다. 산채에 이르러 고추장 얕게 푼 민물새우탕을 나누며 날궂이 파일을 연다. 내 생각으로 내 길을 가라 했다. 몰려다니거나 대세에 이끌리는 것을 의심하고 동문이라고 얼싸안으려 말고 사람의 심지가 따사로운 햇살을 품었는지를 보라고 했다. 그런데 무지하게 들이켠 막 거른 술이 채 섞이지 않아 두런대는 소리 민물새우 우린 틈새에 버무려 흡음되었을까 기억도 요동 없어 질서 정연하다. 이쯤 되면 새로운 날궂이 파일 하나 더 는 셈 알지? 흐린 날, 산채에 이.. 2024. 2. 2.
겨울 만병초 겨울 만병초 온형근 추운 듯 늘어졌으나 힘 빼고 쉬는 중 눈 감고 세상의 번잡을 거둬 찬 듯 당신의 게으름 매끄럽게 미끄러지라고 선명한 녹색에서 반듯함을 덜어내니 연두의 주맥 에, 청승 떨 듯 늘어져 저거를 처량하다고 해야 하나 한량없는 백치미로 겨울을 나란하게 푼다. 어디쯤 다가섰을까 거의 다 도달했을 텐데 오대산 깊은 산능선에서 숨 멈춰 탄성을 내던 만병초 군락이 도심 아파트 단지 몰에서 다소곳 고산의 습도와 새소리만 들리는 적요를 어찌하라고 2024. 2. 1.
영보정 영보정 온형근 먼 뱃길 거친 풍랑 잔잔한 오천항에 머물러라 쉼 없던 거북선, 자라처럼 웅크려 정박하는 동안 충청 수영 몇과 전라 수영 몇이 영보정 마루에 둘러앉는다. 성벽은 오석이라 까마득하니 아득하고 갯벌에 숨 틔며 바지락, 항구 틈새마다 주꾸미 뜻 맞아 풍경 바깥의 심상을 나누는 영보정에서 손 빠르게 우럭과 바닷장어를 손질하여 잠깐 잊었던 천 년의 우의를 되살렸다. 옥마산에서 우람한 골격의 산맥 아래 성주산 성주사지가 안녕하냐고 묻는다. 2024.01.28 - [::신작시::/시의 풍경을 거닐다] - 아라 가야 고분군 아라 가야 고분군 아라 가야 고분군 온형근 끝나지 않을 긴 길을 멧비둘기 서러움 복받쳐 운다. 주고 받는 화음으로 말이산을 경배하는 듯 평지에 돋움새김한 분지를 걷다 만나는 벽오동 나는.. 2024. 1. 31.
아라 가야 고분군 아라 가야 고분군 온형근 끝나지 않을 긴 길을 멧비둘기 서러움 복받쳐 운다. 주고 받는 화음으로 말이산을 경배하는 듯 평지에 돋움새김한 분지를 걷다 만나는 벽오동 나는 누워서 별자리를 들여다 보았다. 아무도 보지 않은 적 없고 누구라도 손가락으로 내 별을 정했었던 그날 이후로 돌로 쌓은 하늘에도 은하수가 흐르고 빛나던 내 별자리 가끔씩 점멸을 느리게 반복한다. 살아 걷던 오늘 하루가 삼기고개를 기어 주저앉아 저린 오금을 주무르더라도 좋아 숨찬 비탈로 매일을 촉촉하게 젖었다고 말해 여기도 꿈을 꾸고 가끔은 젖고 마르지 여차더라도 행여 끄집어 낼 염두 내지 마 당신의 세월처럼 나 역시 우주인 걸 2024. 1. 28.
백석정 누정 백석정 누정 온형근 차량이 쏜살같이 지나는 다리 아래로 감천의 여울은 잔잔하여 맑은데 한 잔의 맑은 녹차를 건네며 백석정이 말을 걸어 온다. 뭐라고 그때 일을 써 바치고 싶다는 모양새로 꿈틀댄다. 서편으로 해가 지려는 때쯤 이미 산그늘로 물살은 진하여 우주 한가득 담기고 늦가을 안개로 피어오를 때마다 젖었던 바위 이끼로 푸르고 붉은 단풍 너풀대며 석양빛 몇 줄기로 타오른다. 수심 낮은 물결 따라 조각배 혼자 노닐게 하니 쉼 없이 무심하여 드리운 낚싯대를 쳐다보는지 알 수 없다. 정자 마루에 앉아 난간을 붙잡은 채 상실의 시대를 하염없이 먼산으로 돌린다. 늦은 달밤 찬기운 몇 잔의 술로 뎁히고 아직 가라앉지 않아 일렁이는 일엽편주에 꽤나 산 날이 많아 어긋나는 순간 있어도 물에 비친 백석정, 내 몸 위에 .. 2024. 1. 27.
솔바람 숲에 눕다 솔바람 숲에 눕다 ​ 온형근 ​ 북저남고의 비스듬한 고구려풍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 풍우는 활짝 열린 하늘을 수놓으며 고스란히 솔숲 바람에 미끄러진다. 남쪽 성벽의 단애 굽어보다 어질하다. 동문을 통해 남문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서 두려움은 헤실거리며 풀린다. 성채 안쪽 짙은 그늘을 따라 올라가며 도열한 둥근 강돌의 석환石丸. 제각기 속살로 파고든 접선은 치안을 담보하였다. ​ 애틋하여 그리워하는 정 흠뻑 담아 잘 만든 콘크리트 정자, 사모정까지만 오르고 말 것을. 조남익 시인의 '온달장군을 위한 진혼곡'을 읽고 나니 시인과 각자와 시주의 묘합이 담대함을 솟구친다. 단숨에 달려 오르는 남한강 북풍에 탑승하여 훌쩍 산성 안을 사뿐히 걷는다. ​ 말 부려 뛰고 달리면 말의 무릎이 쉬 닳을까. 급정거와.. 2024. 1. 25.
엄동설한 엄동설한 온형근 매일 추위는 엄격했고 폭설의 겨울이었지 눈을 비벼 개서 큰 블록을 찍어 에스키모의 이글루를 만드는 공사는 우물 가까운 언덕 한 켠이었어 아무나 껴주지 않았지 소수 정예 어른들은 지나면서 야무지게 설계하여 진행하는 이글루 모습을 신통한 듯 뭐라고 관여하고 싶었겠지 어림없었어 도면에 없는 지침이었거든 중단 없었지 엄마가 밥 먹으라 부르면 교대로 들락댔지 양동이는 연신 물 뿌리며 엄동을 재촉하고 우물물은 이글루에 퍼질러 미끄러졌고 반짝거리며 파르르 떨면서 단단해졌지 좀 더 크게 만들 것을 거적과 솜이불 같은 거 깔고 두 명 들앉아 뭐가 그리 좋았을까 희희낙락 대며 바깥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교대하자는 걸 못 들은 척하는 잔망스러움은 오늘같이 춥고 엄한 날일수록 그 추웠던 제천의 어린 날이 생생.. 2024. 1. 25.
닭실 마을 청암정 닭실 마을 청암정 온형근 연못 물 빠져나가니 생생하게 용트림하던 왕버들 누웠으나 등골을 바로 세워 위로 솟게 한 새 줄기 지상을 디디고 활개 편다. 한 자 반 돌다리를 막아선 대나무 울도 섧다. 많은 것이 지고 피니 새로 갈 길을 찾는 게 마땅 청암정 정자를 등에 인 거대한 암반의 거북은 대체 곁을 내주지 않을 듯 장엄한데 못을 이룬 석축 호안 주변 낙락장송과 왕버들은 몇 번의 환골탈태를 꿈꾸었을까 지극 간단한 일자형 돌계단 위를 지나면 청암정 계자 난간 붙잡고 우물마루에 앉아 사시가경四時佳景으로 어울린다. 울긋불긋 가을 묵상은 예고했을까 한 겨울 맵시 암벽을 뚫고 돌다리 건넌 단풍나무에게 묻는다. 먼 풍경이 가까운 사람의 온도만 할까 내성천에서 발길 돌린 가계천으로 들락대던 멧비둘기 너의 울음 가닥에 .. 2024. 1. 18.
운암과 수운정 운암과 수운정 온형근 마치 맑은 가을 하늘 구름 한 조각 어디론가 떠날 줄 몰라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인암은 볼 게 없다며 먼저 찾았다더니 어느새 오가며 들렸던 옛사람 몇은 신선의 세례로 운암과 사인암을 오가며 현학玄鶴과 백록白鹿을 벗하였다더니 명승을 친구 삼아 떠돌다 운암 앞을 휘몰아 흐르는 끊임없이 지즐대는 명랑한 물소리에 머문다. 과연 유상곡수流觴曲水 자리 여기저기 드러난다. 나는 이곳 너럭바위에 앉아 붉은 곰팡이 이는 속세를 잊을래 내 앞에 당도한 술잔 받아 들고 고개 돌려 단정한 구름같이 우아하게 정좌한다. 바위를 두어 번 휘몰아 흐르는 아직도 맑기만 한 계류 굽어살피던 붉은 기운의 암벽, 석영을 캐어 단약을 고을 때 넣는다더니 나는 모른다. 네가 다다르는 강 건너 운암뜰로 나아갈 제 물속에 잠겼.. 2024. 1. 18.
우듬지 우듬지온형근      상수리나무 우듬지는 바람으로 성장하고 몸살 한다. 오솔길에 몸져누운 초단부 잎사귀는 꺾이기 쉬웠던 마디에서 뭉친 채 기울어 뒹군다. 말라 오그라든 잎에서 방금 떨어진 잎새까지 지상에서의 소소한 연륜을 증명하듯​   죽음도 오므라지면서 말라가는 것   윤기 줄고 말수 끊기는 것   예상치 않은 험한 일에 놀라    가슴 철렁 내려앉고    언덕과 내리막에서 여러 번 접질리고   마른다는 게 바람이고   바람이 숨이고 명줄이어서   그예 실려 살고 지는 거​   꼭대기에서 떨어져 지상에서 잠깐 여위는 거​​   - 「우듬지」, 『다시올문학』, 2022년 여름호(통권 52호), 47쪽. 2024. 1. 14.
유현재幽玄岾 유현재幽玄岾온형근      바람길이었던 그의 고개는 달름하다.   호수에서 산 쪽 바라보매 세 번 굴절되어   마지막 고갯길은 아득한 듯 숲이다.   하나를 후미지게 길이로 끌러 두더니   두 번째 고개를 두둑 쌓듯 가로지른다.   도톰하게 포갠 입술 속이 그윽하다.​   무릇 보이는 것에 마음이 다가서듯   깊고 그윽한 지경에 닿는 것은   고갯길이 아니라 속내를 부르는 풍치여서   절로 흥 불러내는 아름다운 지경이라   드러내는 너와 보고 있는 내가 낳은 풍경이   꺾어 도는 고갯길의 유현幽玄을 짓는다.​​   -「유현재幽玄岾」, 『다시올문학』, 2022년 여름호(통권 52호), 46쪽. 2024. 1. 14.
추모의 헌다 추모의 獻茶#茶緣茶事 추모의 헌다獻茶는 늘 황차이다. 근래 보이차로 급격하게 변모한 차생활에서 그나마 부모님께 올리는 헌다가 있어서 반발효차인 고뿔차, 황차의 구수함에 스민다. 매일 녹차로 이어지던 차생활에서 황차를 만난 것도 엊그제 같은데 모든 게 아득히 멀다. 때가되면 잊지 않고 황차를 제다하고 일 년치 헌다와 차생활에 가깝게 품는다. 작년에는 남은 게 있어서 건넜지만 올해는 때 기다려 제다에 들 일이다. 차의 향이 다시 일어나 향에 취하고 목넘김 또한 짙은 바디감으로 온몸을 휘감는다. 서너 주전자에 등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차의 기운이란 이런 것이다. 맛만 좋고 몸이 반응을 하지 않는 여러 차들과는 결이 다르다. - 이천이십사년 정월 열이튿날, 월백다원 2024. 1. 13.
완이재를 다시 읽는다 완이재를 다시 읽는다온형근   기쁨을 즐겨 살핀다고 객관율을 부여해   완이재翫怡岾,   완상의 즐거움으로 여덟 구비 언덕을 아꼈다.   오르거나 내릴 적에 우회하지 않는다.   맞대면으로 부대낀다.   피한다고 상대가 포기하는 법은 없기에   가장 늦게 눈이 녹는 얼음판 넷째 구비에도   살얼음일지언정 설설 기는 종종걸음으로 응대한다.   이른 곳은 묵은 얼음 녹아 질척인다.   곳곳에 피어난 햇살만으로 봄 기운 어찌하다 말하기에 맹랑하다.   터무니 없이 빈정을 듣다 결연하게 내쳤던 지난날이 있기에   거칠고 험한 고개일수록 즐긴다.   뻔한 수고로움 동반한 고통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길로 들어서면 어디를 통과하고 나오는 곳까지 뚜렷한데도 2024. 1. 13.
나무의 직립성 나무의 직립성 온형근 내원재 중턱이면 거리의 옷을 벗는다. 이미 덥혀지고 충분히 예열되어 洗心臺로 오른다. 원림을 미음완보할 숲의 옷으로 환복한다. 청딱따구리 굵직한 공명으로 사르륵 웃옷을 벗기는 데 동참한다. 내원재 고개길마다 직립한 나무의 안위는 치고 올라온 눈발을 곧은 줄기로 막아 선 채 밤새워 어울리며 흔퇘히 놀아난 흔적 남겼다. 동쪽 언덕 바라보며 맞선 눈발은 서쪽 줄기, 그림자처럼 길게 맨살이다. 나무의 직립이 눈발의 그림자를 언덕 이으며 남겼는데 온통 새하얗게 덮인 숲에서 솔잎 쌓인 숲의 맨살이 지상으로 직립을 긋고 걸음마다에 직립의 꿈을 놓지 마라 일깨운다. 흰 도화지에 나무를 그린 후 명암을 뽑듯 2024. 1. 11.
겨울 산책 겨울 산책 온형근 아침해 산능선 위로 고개 기웃댈 때 까치와 청설모만 산을 지킨다. 비스듬히 언덕배기 덮인 눈 위로 햇살 급하게 머물다 떠날 때 비로소 기운 나무들로 겨울 산책이 위태롭다. 보이는 것은 늘 위태로울 때, 유난히 추운 겨울을 발 종종대며 마음 놓지 못했던 눈길에 나 있는 발자국이 여태 판국을 이끌고 있음을 흰눈에 비친 새파란 하늘로 한결 으스스 춥다. 2024. 1. 8.
인물론 인물론 온형근 그가 인물이었음을 이미 알았고 앞선 날들이 정체된 시절과 만나 눈치로 때우는 이들에게는 면전에서 추켜세우는 잠시 눈발 휘날리는 허허벌판 몇 번 건너다 길 홀려 제 자리로 몇 바퀴 돌고 나서는 살 에는 찬바람 골짜기로 갇혔다. 인물은 빠르게 시절을 건너는 거라서 미끄러울 때 설설 기며 조금씩이라도 나서고 넘어지면 그곳이 풀섶이라 아늑하여 때로는 묻혀 더부살이로 움츠리고 낯설고 외진 곳에서 이름없이 머물러야 인물도 숙성되어 힘 안들이고 내공을 구사할진대 꽉 막힌 일상에서 일탈은 안빈낙도라 그 인물 가까이 다가서니 이제야 알 듯 흰 눈의 오솔길로 남긴 발자욱 따라 시린 손끝 꼭 눌러 비빈다. 2024. 1. 7.
103-이종문, 묵 값은 내가 낼게 묵 값은 내가 낼게 / 이종문 그해 가을 그 묵 집에서 그 귀여운 여학생이 묵 그릇에 툭, 떨어진 느티나무 잎새 둘을 냠냠냠 씹어보는 양 시늉 짓다 말을 했네 저 만약 출세를 해 제 손으로 돈을 벌면 선생님 팔짱 끼고 경포대를 한 바퀴 돈 뒤 겸상해 마주보면서…… 묵을 먹을 거예요 내 겨우 입을 벌려 아내에게 허락 받고 팔짱 낄 만반 준비 다 갖춘 지 오래인데 그녀는 졸업을 한 뒤 소식을 뚝, 끊고 있네 도대체 그 출세란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출세를 아직도 못했나 보네 공연히 가슴이 아프네, 부디 빨리 출세하게 그런데, 여보게나, 경포대를 도는 일에 왜 하필 그 어려운 출세를 꼭 해야 하나 출세를 못해도 돌자, 묵 값은 내가 낼게 [온형근의 詩視時] 묵밥을 좋아한다. 가끔 그 고소한 맛으로 고.. 2019. 1. 15.
102-천양희, 그늘에 기대다 그늘에 기대다 / 천양희 ​ ​ 나무에 기대어 쉴 때 나를 굽어보며 나무는 한 뼘의 그늘을 주었다 그늘에다 나무처럼 곧은 맹세를 적은 적 있다 누구나 헛되이 보낸 오늘이 없지 않겠으나 돌아보면 큰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 것 작은 것이 아름답다던 슈마허도 세계를 흐느끼다 갔을 것이다 오늘의 내 궁리는 나무를 통해 어떻게 산을 이해할까, 이다 나에게는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어 흐리면 속썩은풀을 씹고 골짜기마다 메아리를 옮긴다 내 마음은 벼랑인데 푸른 것은 오직 저 생명의 나무뿐 서로 겹쳐 있고 서로 스며 있구나 아무래도 나는 산길을 통해 그늘을 써야겠다 수풀떠들썩팔랑나비들이 떠들썩하기 전에 나무들 속이 어두워지기 전에 [온형근의 詩視時]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마냥 허투루 떠들썩하면서 놀고 싶다. 하루.. 2019. 1. 13.
101-김삼환, 그리움의 동의어 그리움의 동의어 / 김삼환 새벽 풍경 지켜보는 새라 해도 좋겠다 내 몸 안에 흐르는 강물이면 어떤가 산책로 비탈에 놓인 빈 의자도 좋겠다 버리기 전 세간 위에 지문으로 새겨진 눈물 흔적 비춰보는 달빛이면 또 어떤가 그날 밤 술잔 위에 뜬 별이라도 좋겠다 깨알같이 많은 어록 남겨놓은 발자국에 비포장 길 얼룩 같은 달그림자 지는 시간 빈 방을 돌고 나가는 바람이면 더 좋겠다 [온형근의 詩視時] 그리움을 닮아 있는 날들이 있다. 종일 내내 그리움일 수 있는 그런 날들도 있다. 나의 그리움은 연말부터 시작되어 매일 茶禮를 올리는 것으로 이르렀다. 오늘은 녹차를 우려서 정결하게 올린다. 이제는 혼자 사니까, 속으로 뇌이는 게 아니라, 겉으로 중얼대며 말한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호칭을 매일 달고 사는 것이 된 셈이.. 2019. 1. 12.
021. 사리암 가는 길에서 묻는다- 사리암 021. 사리암 가는 길에서 묻는다.-호거산운문사 사리암 / 온형근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들의 존재감 사리암을 찾았다. 20주년에 이른 조경문화답사동인 ‘다랑쉬’의 회장단 신년교례회를 울산에서 열었다. 20년을 회고하자 했으나, 묻어 버리자고 했다. 다가오는 미래의 20년을 내다보자는 .. 2019. 1. 6.
상수리나무 엽서 상수리나무 엽서 온형근 백마강 부소산 절벽 꼭대기에서 강 건너 멀리 청마산을 돋움하여 안개 걷힌 가을 하늘 깊다 했더니 상수리나무 지는 잎도 서걱대며 바람 거슬러 끝모를 비행 부딪칠 때마다 들려오는 비명 사각으로 날며 사각사각 쉼없는 방언 날리며 사부작댄다 긴 강줄기에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바람길에서 벗어나 절명 모여 뭉친 낙엽 무리에서 바스락 소리는 해체되지 않은 채 혼자 떠도는 잎새에게 보내는 엽서 꼬리 끊기지 않은 금강 줄기로 속절없이 흐르는 강물을 닮아 여즉 속내없이 떨어지며 날고 있다 오고 가며 기쁨이었다 절망일 소멸로 -온형근, ‘상수리나무 엽서’, 전문 2018.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