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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한 길

by 나무에게 2017. 1. 5.

헐렁한 길
-정유년, 자화상 / 온형근


짜여진 길을 걷다 보면 쉬 질린다
마루 바닥에서 삐그덕 대며 걷는 일이
호수의 찹쌀같이 달라붙는 촉촉한 각성
잠시 잠깐 놓칠 즈음이면 규격화된 길에서
눈 감고 걸어도 되는 발걸음에 맡긴 채
날숨과 들숨의 깊이와 시간에 존재한다

눅눅하여 뼤마디도 시리고 이탈되듯 저린데
저절로 길이여 헐렁하여 당최 예측 어려운
편안하여 지기로 온유한 기름진 숲길이여
호흡 생각 따위 자로 잰 듯 꽉 찬 논리여
방어 급급 똑똑해지는 순간을 오려 낸다

예서 출발하여 찍고 되돌아 오는 외길보다
시작한 길도 되돌려 끝내는 확정의 지점도
예고 조차 미완인 길의 날 것으로 아예
길이었으나 구획되지 않아 벗겨진 세계의 한 쪽
짐승이었다 사람이었던 흔적의 징표로 다행인
허술하여 겨드랑이로 바람길 열렸고 손 시린

헐렁한 길이여 내 앞의 느슨한 전도여 고마워라
밝지 않아 정해 놓은 적 없이 홀랑 벗겨져도
대지여 제발 그리하여라 범하지 말지어라
차곡차곡 쌓지 말고 사방 흐트려 되살리어라
헤먹은 길에서 춤 추며 받아 들이는 아득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