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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교육에 '새 것'은 '헌 것'보다 못하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보수와 진보의 구별로 대별되는 사회에서는 진보의 가치에 이끌리는 경향을 보인다. 왠지 보수는 고리타분하여 자극적이지 않고, 진보의 논리는 한 번씩 곱씹어 볼만한 짜릿함이 있다. 그러니 술좌석에서는 보수 관련 이야기보다 짜릿한 진보적 발언에 흥미 있게 올인한다. 돌아서면 그 또한 별 일 아닌 것을, 평범한 일상을 숨기기 위해 떠들어 댄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일상과 짜릿함이 번갈아 교차하는 게 평범한 사람들의 소위 '국민'이고 '대중'이 아닐까. 그러니 각종 선거에 임한 사람마다 '궁민'이 원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국민'이건 '궁민'이건 날조된 호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흔쾌히 때가되면 그들이 쳐 놓은 그물망에 철커덕 걸려 들어 놀아 주는 것이다. '대중'이고 '대충'인지 모른다.

최근에 교육감 선거가 직접선거로 바뀌었다. 이제는 '국민'이나 '대중'보다는 주로 '학부모'와 '학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각종 정책이 쏟아진다. 아주 보수적인 기득권 후보가 있는가 하면, 반짝이는 '새로운' 후보도 있다. 그런 정책 아닌 상호 비교를 읽고 들으면서 반문한다. 교육에서 새로운 것이 왜 그리 필요하고, 정책을 바꾸어야 할 일이 왜 그리 많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미친다. 나도 교육 현장에 있다. 그것도 전문계고등학교에 근무한다. 늘 실험실습에 관련된 교육이 중요한 입장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을 바꾸고 새롭게 뭔가를 만드는 일에 점점 회의적이 되고 있다. 과연 '새 것'이 교육을 바꾸는 일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헌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할 교육의 맹아인가.

정조대왕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을 “옛것[古]을 익혀서 새것[新]을 안다”는 말로 풀이하지 않았다. “이미 얻은 정보를 거듭 연구하면, 그 정보에서 저절로 새로이 깨닫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절로 새로이 깨닫는 맛' 이것을 되새겨 본다. 실험실습 기자재나 물품이 없어서 교육이 어렵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주 결론에 이른 것이 '궁리'이다. 연구나 철학도 아닌 '궁리' 정도면 교육이 이루어진다. 현재 대학 입시제에 의하면 성적 올리는 데에만 모든 역량을 몰입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창의성 있는 다양한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특수목적고등학교나 전문계고등학교는 이와 다르다. '궁리'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새 것'만을 기다리며 '새 것'이 없어서 교육이 어렵다는 말을 하면 곤란하다. 그 어렵던 시절에 인재를 키워 낸 '옛 스승'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교육이 오늘날 어떤 신식 교육보다 못한 게 있겠는가 생각하면 된다.

교육에 '새 것'이 '헌 것'보다 나은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내용이 얼마나 되는가? 그것보다는 '절로 새로이 깨닫는 맛'과 '궁리'를 서로 통하게 하는 게 귀중하지 않을까. 이 맛은 스스로 교육에 임하는 사람이 찾아서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맛을 느낄 수 없다면 교육의 깊은 세계에 빠지지 못한 것이다. 다양한 상황과 요구에 의한 멀티플레이를 구사하여야 하는 게 교사다. 없으면 없는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교육의 대상인 학생의 수준과 욕구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게 그냥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일반계고교는 하나의 수준과 욕구로 교육을 이끌어가고 있다. 입시 위주일 수밖에 없는 성적 올리기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계고교는 다르다. 심지어 학생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교사가 찾아내 주고 안내해 주어야 하는 실정이다. 그러니 '궁리'가 필요하고 그래서 이런 과정을 통하여 '절로 새롭게 깨닫는 맛'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