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권벌, 해동잡록6_정여창

by 나무에게 2013. 12. 24.

해동잡록 6    
 
정여창(鄭汝昌)

본관은 하동인데, 자는 백욱(伯勗)이며, 호는 일두(一蠹)이다.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보고 특이하게 여겨 설을 지어 이름지어 주었다. 성품이 단정하고 침착하고 고요해서 사귀어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홀로 한훤선생(寒暄先生 김굉필(金宏弼))과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함께 종유하였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같은 무리에서 이학(理學)으로써 추앙하였다. 성종 경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천거되어 보직되었고, 지방으로 나가서는 안음 현감(安陰縣監) 벼슬을 받았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종성(鐘城)으로 귀양가서 적소에서 죽었다. 중종이 명하여 우의정을 증직하고, 고을의 원으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사당에 몸소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뒤에 문헌(文獻)이라 시호하고,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

○ 선생은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고, 비록 무더위에라도 처자(妻子)가 그의 속살을 보지 못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선생이 늘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어머니 곁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멀리 떨어진 적이 없었다. 〈행장〉

○ 선생이 지리산(智異山)에서 놀다가 진산(晉山)의 악양류(岳陽樓)와 동정호(洞庭湖)를 구경하고 이를 사랑하여, 섬진(蟾津)의 어귀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나무를 심고서 장래에 그곳에서 늙으려 하였다. 〈행장〉

○ 안음현에 광풍루(光風樓)와 제월당(霽月堂)이 있는데, 선생이 현감이었을 때에 세워서 이름지었다. ≪동국여지승람≫

○ 선생이 안음 현감이었을 때에, 무릇 자녀가 있으나 가난하여 재물이 없어서 오래도록 혼인을 못시킨 사람은 스스로 알리게 하였는데 매우 두텁게 도움을 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니, 온 고장이 크게 의지하였다. 〈행장〉

○ 안음에 나가 원이 되어 사무에 임하는 여가에 읍내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서 몸소 가르침을 행하고 날마다 강독(講讀)을 과제(課題)하니, 학자들이 이를 듣고 멀리서 모여 왔다. 봄ㆍ가을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여 안팎 마루에서 베푸니, 남녀 늙은이가 취하고 배부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정치는 맑고 백성은 기뻐하며, 고장 안이 서로 일깨우며, 속임수로 공을 배반하지 말라 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선생이 중년에 소주를 마시고 광야(曠野)에 취해 쓰러져서 한 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되어 굶었는데, 이때부터 음복(飮福) 밖에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이 술을 내린 적이 있는데 선생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어미가 살았을 때에 술 마시는 것을 꾸짖으므로, 신이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동상

○ 선생이 무릇 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이 의롭지 않은 데에 이르지 않으면 감히 어기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뜻도 의가 아닌 것으로 공의 마음을 상하지 않은 까닭에 어머니는 잘못하는 일이 없고 아들은 조금도 순종을 잃은 적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온 집안이 의(義)를 행한다고 하였다. ≪경현록(景賢錄)≫

○ 선생이 일찍이 태학(太學)에 가서 공부하다가 어머니를 뵈러 집에 갔더니, 집안에 전염병이 바야흐로 크게 펴졌는데, 공이 들어가서 그 어머니를 뵈고 얼마 안 지나서 어머니가 이질(痢疾)을 얻어 매우 위독하니,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이윽고 똥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소리치며 울어서 피를 토하였으며, 염습빈전(殮襲殯奠)을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랐다. 장사 지내려 할 적에 감사(監司)가 군(郡)으로 하여금 곽판(槨板 관을 짜는 판자)을 마련해 주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곽판을 얻으면 원망이 반드시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하고, 이에 자기 집의 재물을 내서 바꾸어 사서 썼다. 때마침 장마가 열흘 동안 계속 이어져 시내 골짜기가 넘치니,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몰랐는데, 하늘이 갑자기 개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3년 동안 여묘살이하는 동리에서 나가지 않았고, 하루도 베옷을 벗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묘를 같은 묘자리에 옮겼다. ≪유선록≫

○ 선생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평생에 말과 웃음이 적었고 혹시 이야기가 육아(蓼莪)에 미치면 왈칵 눈물을 흘리고, 슬프고 아파서 숨도 쉬지 못하였다. ≪유선록≫

○ 백욱은 주(周)ㆍ정(程)ㆍ장(張)ㆍ주(朱)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모두 송 나라의 도학자]의 식견이 있어서, 오경(五經)에 통달하였으나 유독 시를 힘쓰는 선비는 취하지 않으며, “시는 성정(性情)의 발로인데, 어찌 지저분하게 굳이 공부할 것이랴.”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상상(上庠 대학(大學))에 들어가서 여러 벗들과 재실(齋室) 안에서 잘 적에 달게 자는 것 같은데 실제는 자지 않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더니, 어느날 밤에 벗에게 들켰다. 성균관에서 도(道)를 생각하는 공부가 있다고 하여 더욱더 존경하였다. ≪유선록≫

○ 선생이 일찍이 〈용학주소(庸學註疏)〉와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과 〈진수잡저(進修雜著)〉를 지었는데,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처자(妻子)가 다 불 속에 던졌다. 상동

○ 선생이 오경에 밝아서 그 궁극적인 취지를 구명하였으며, ≪노론(魯論)≫에 더욱 정세(精細)하여 이학(理學)의 근원을 매우 탐구하여서, 드디어 본체와 응용의 학문을 다하였다. 동상

○ 선생이 학문할 적에 독학(篤學)을 본령(本領)으로 삼았으며, 일찍이 말하기를, “질(質)이 남보다 떨어지는데, 충분한 힘씀이 없으면 어찌 실터럭 같은 효과라도 얻으랴. 비유하건대, 자갈밭에 곡식을 심으면 좋은 벼가 무성하지 않고 기름진 땅에는 우웡풀, 가라지풀이 쉽게 나는 것 같으니, 만약 북돋우고 김매는 노력이 없다면 비록 좋은 밭이라도 나을 것이 무엇 있으랴.”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일찍이 향회(鄕會)에서 쇠고기를 마련한 일이 있는데, 어떤 자가 금물(禁物)이라 하여 관가에 송사하니 장차 범죄에 저촉되므로 어머님이 깊이 근심하였다. 공이 이때부터 아주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 선생이 형제 자매와 더불어 노비와 전토를 나눌 적에, 먼저 늙고 약한 자와 메마른 것을 차지하였는데, 한 매부가 오히려 한(恨)을 삼자, 문득 자기의 것을 주었다. 동상

○ 선생이 마음씀씀이에 속이지 않는 것을 주장으로 삼았다. 일찍이 여러 딸들에게, “뒷날 네 집에 가거든 동서들을 대우함에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야 하며, 오직 형제의 환심(歡心)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동상

○ 선생이 어머니 상사를 만나 벽용(擗踊 매우 애통하여 가슴을 치고 뛰는 것)한 나머지, 죽도 목구멍을 내려가지 못하였다. 안음에 원으로 나가서, 백성의 괴로움이 세금과 부역에 있음을 알고, 드디어 편의(便宜)대로 몇 10조(條)를 만들어서 시행한 지 한 1년 만에 정사가 맑아지고 백성이 기뻐하였다. 종성에 귀양가 있는 7년 동안 편안하게 행동하였다. 귀양가 처음에 정로부(庭爐夫)로 정해졌는데, 사신이 공관(公館)에 들 때마다 곧 불 때는 일을 매우 공손하게 집행하였다. ≪경현록≫

○ 선생이 오경(五經)에 밝아서 그 깊은 뜻을 철저히 다 구명하여, 본체와 응용이 근원은 같고 분수가 다름을 알았으며, 선악(善惡)이 분수는 같고 기(氣)가 다름을 알았으며, 유교와 불교가 본래의 길은 같고 거쳐 가는 길이 다름을 알았다. 성품이 단정하고 무거워서 술과 단술을 마시지 않고 훈채(葷菜 자극성 있고 냄새 나는 채소. 마늘 따위)를 먹지 않았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함양군(咸陽郡) 동쪽에 남계(藍溪)가 있는데, 선생이 예전에 살던 곳이다. 군(郡) 사람들이 시냇가에 서원(書院)을 지어 제사지내는데, 편액하기를 남계서원(藍溪書院)이라 하였다. 동상

○ 선생이 평생에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두류산(頭流山)에 복축(卜築 터를 골라서 집을 짓는 것)할 적에 지은 시 한 편만이 있어 세상에 전하는데,

바람에 부들이 휘날리어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 風蒲獵獵弄輕柔
사월에 화개(땅 이름)에는 보리가 벌써 가을일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 觀盡頭流千萬疊
조각배로 또다시 큰 강 흐름에 내려가네 / 扁舟又下大江流

하였다. 가슴속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 낀 모습이 없는 것을 이로써 상상할 만하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백욱이 마음을 잡는다는 것은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이는 데에 있다는 설(說)을 써서, 마음을 가리켜 드나드는 물건이라 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이 이를 따져, “마음이 어찌 드나듭니까?” 하니, 백욱이, “여기에 앉아 있는데 마음은 천리 밖에 놀고, 잠깐 사이에 들어와 몸 속에 있으니, 드나드는 것이 아닙니까.” 하자, 추강이, “잡으면 형기(形氣)가 맑고 순수하여 이 마음이 깨끗하고 밝아서 늘 보존되니 이른바 들어감이요, 놓아두면 형기가 흐리고 어지러워서 이 마음을 덮어 가리어 외부의 유혹이 주관하니 이른바 나아감이지, 참으로 드나듦이 아닙니다.” 하였다. 〈심론(心論)〉


[주D-001]염습빈전(殮襲殯奠) : 염과 습은 주검에 임하는 속옷과 겉옷, 빈은 장사 지내기 전에 시체를 안치하는 것, 전은 잔 드리는 것, 곧 상례를 뜻함.

[주D-002]육아(蓼莪) :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있는 편명(篇名)임. 모두 6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효자가 어렵게 길러주신 어버이를 부양하지 못함을 비통해 하는 내용이다.

[주D-003]《노론》 : 《논어(論語)》에 제 나라의 논어[齊論]와 노 나라의 논어[魯論]의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 세상에 행하는 논어는 바로 노론이다.

'::나무와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치윤, 해동역사-최치원  (0) 2013.12.24
김육, 잠곡유고 제4권-소차_오현을 종사하기를 청하는 소  (0) 2013.12.24
산기도를 배운다  (0) 2013.12.24
오행 일람  (0) 2013.12.24
오색의 성질  (0) 2013.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