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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장안문에서 팔달문 사이

by 나무에게 2015. 8. 31.

 

걷기 운동으로는 민망할 거리다. 사람 꽤나 종종거린다. 화성 걷기로 치면 성안으로 두둑한 흙길이겠으나 도심은 딱딱한 포장길이다. 좁아서 마주치거나 버스정류장 근처는 더디다. 사람으로 뭉쳐있다. 교통의 퍼짐이 능수능란하다. 언제부턴가 이곳 몰골을 엉성하게 지켜냈던 플라터너스 가로수가 달라졌다. 흉내만 내다 말겠지 했다. 그러더니 수원의 명경으로 뜬다. 나만 그랬을까. 장안문에서 팔달문 사이의 가로 경관이 플라타너스로만 치환된다. 장하다. 해 거듭 날로 진화된다. 자리 잡는다. 직방형 수관이 멋지다. 프랑스 파리의 피나무가 따라올까. 그들은 지상부를 연이어 붙이지 않던가. 띄엄거리며 땅을 내딛었으나 원래 서있던 자리다. 도심 가로를 향한 상가 빌딩과 친하게 닮아 있다. 건물과 가로수가 손 잡고 밤마다 내통하면 닮아진다. 잊지 않고 서로를 탐하면 생김새까지 서로를 투영힌다. 수원의 팔달문을 향하는 성빈센트 병원에서 못골시장 가로의 은행나무 구형의 단정함의 인위는 또 다른 맛이다. 직방의 녹색 구조물이 생동이다. 살아있는 구조물이어 눈 시원하다. 구조화된 도시는 플라타너스로 착시되어 동급의 생명력을 지닌다. 흐뭇한 바라봄이다. 혼자 은근하게 보고 즐기는 놀이다. 바라봄이 그렇다. 볼 수 있다는 것의 속성이 다들 그렇다. 패스워드 하나씩은 모두 갖춘 셈이다. 그 비의를 살강을 걷 듯 살펴 나가는 것은 보는 자의 몫이다. 보고 보여지고 보는 일이 깨닫는 자의 시점이다. 시점이란 특정하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직방을 찾거나 구형으로 흐르거나 거리끼지 않는다. 시점은 자유롭다. 그래서 직방의 플라타너스도 근사함을 넘어서서 도시를 완성하는데 직방으로 소용된다. 쓸만하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동의어다. 비의이며 비경을 지녔다. 그래서 안부를 묻는다. 아직 비의이고 비경이냐고.

 

출처 : :::사이SAI:::조경문화교육공동체
글쓴이 : 나무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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