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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休林山房

014. 아직도 구태의연이라면

by 나무에게 2015. 2. 20.



014. 아직도 구태의연이라면 / 온형근



세월은 거꾸로 도는가

연말 어수선함이 걷힌다. 동지 지나 네 번째 절기다. 우수雨水다. 봄을 부르는 비다. 입춘이후 둘째 절기다. 설날인 어제가 우수의 시작이었다. 자고나니 많은 것을 비운 듯 맑아진다. 나 역시 많이 비운 것이다. 새로운 기운이 적셔진다. 오늘은 가족 산행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부르는 것이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오래전 내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들은 왜 일어날까. 아직 비운 듯 비우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잠결에 새로 부임하는 학교에서 맞이하게 될 일과 삶에 대한 마음조림이 있었던 게다. 아무거나 다 해 낼 수 있다고 나를 다독여 놓고는 무의식의 심연에서는 트라우마처럼 거부하는 게 있다. 겉으로는 상관없다고 애써 해명하지만 속마음에는 남과 나를 비교한다. 대의명분만 뚜렷하면 그 어떤 희생도 정성으로 감당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얼마나 많이 힘들게 했던가. 아무리 세월이 가도 새 학기 새 업무를 맡을 때쯤이면 구태의연한 몇 가지 상념에 사로잡힌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연초마다 대의와 명분, 그리고 실리 사이에 놓였다. 나는 대의와 명분에 섰다. 실리에 선 이들의 전년도 또는 구태의연한 수법에 분노했다. '연초 당기고 늘이는 일만 잘하면 한 해가 평탄하다.'라는 이들 사이에 전설처럼 떠도는 행동강령에 치를 떨었다. 다행 몇 동료가 뜻을 같이 했다. 대의와 명분이 공공적이라면 실리는 지극히 사적인 염원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보면 임진왜란 와중에 백성만을 위하여 실리를 취한 사례가 수없이 등장한다. 한결같이 대의명분에 바탕한 실리였다. 나의 희생과 정성이 뿌리를 이루는 실리다. 나라를 전쟁에서 구하고 바로 세우겠다는 공공의 실리다. 이처럼 실리가 공공의 앞에 설 때 대의명분과 실리는 굳이 대립각일 필요가 없다. 사적인 염원으로 실리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 학생 중심인가 교사 중심인가, 특성화교육인가 일반교육인가, 수업인가 업무인가, 학교인가 가정인가, 동료인가 관리자인가, 아니면 다 밟고 나만 우뚝서야 하기 때문인가.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을까.


그동안 무엇을 하였을까

등장인물이 많은 대하소설인 징비록에서 박진감 있고 급하게 언급한 인물들 속에서 다양한 삶을 본다. 명멸하는 임진왜란 때의 행적과 그 이전, 이후를 연대기적 인물사를 친절하게 주를 달았다. 소설처럼 흐름있게 읽으려면 주를 읽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흐름을 놓치더라도 인물에 대한 주를 놓치지 않으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올곧은 처신을 얻는다. 연초 밀당 고수들의 주된 관심사는 수업시수이다. 어떤 내용과 교과목으로 학생 앞에 나서는가 보다, 수업시수 자체가 적어야 한다. 포장 운영이 간단해야 한다. 실습포장의 중요도가 낮은 것을 요구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이름 뿐인 포장을 원한다. 반면 행정업무는 본인의 승진을 위하여 필요한 자리를 고도의 술수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행태로 차지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함께 일할 동료를 사전 모색으로 선별하여 보내고 받고 하여 구설수늘 늘린다. 그러느라고 연말연초가 되면 못되고 삿된 사람으로 바뀐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학교장은 학교 운영을 위한 관리자로 임명된다. 혼자하는 일을 도우라고 교감을 앉혀준다. 교감은 교사와 교장을 조절하고 윤택하게 하는 자리라고들 말한다. 속사정은 매우 다르다. 교감은 교장의 평가가 승진에 절대적이다. 많은 곳에서 학교장의 예스맨으로 노예처럼 굴종한다. 일을 많이하는 교감은 일의 영역에서 인정받아 일로서 독자적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 일조차 하기 싫으면 철저하게 학교장을 모시는 일에 전념하면 된다. 공공의 직위를 사적인 통념과 일상으로 치환시킨다. 단위학교에 즐비하다. 어느 순간 교사는 희망과 기대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다. 이때 두 가지 양상이 발생한다. 어려운 여건에서 본질과 뿌리를 지키고 스스로 역량을 확대하는 류와 고개 들어 나도 저렇게 쉬운 길로 가야겠다는 류로 나뉜다. 특성화교육에서는 역량을 스스로 키워 학생과 학교에 적용하는 교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를 담아낼 수 있는가

수업시수와 실습포장과 업무에서 사심의 강도를 높이고, 사심을 위하여 동분서주 한 교사가 다시 교감이 되고 학교장이 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들은 되고 나서도 근무하고 싶은 곳을 선택하고자 다시 동분서주 한다. 인위적인 마음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해하는 반대급부를 낳는다. 욕심을 드러내는 것은 동료 의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을 가르치는 이의 덕목도 아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는, 다음 세대에게 물러주어야 할 농업교육의 가치는, 지구환경의 미래와 함께 하는 농산업교육의 패러다임은 결국 인성을 바탕으로 한 생명교육이다. 관리자나 업무, 지역사회, 교사가 먼저가 아니다. 17-19세의 예민하고 중요한 인생의 골든타임을 보내고 있는 내 학생이 우선이다. 내 자식이 아닌 내 학생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교수학습과정에 나타나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차를 마시면서 심지어 수업시간 속에서도 더 나은 교수학습과정을 구안한다. 큰 윤곽으로 갔다가 아주 작은 세부로 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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