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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나그네와 물과 길과 도로

by 나무에게 2013. 12. 24.

1. 물과 길

물이 흐른다. 높이를 뒤로하고 흐른다. 조금이라도 낮은 곳을 향한다. 태초에 길은 없었다. 물이 길을 내고 있었다. 물은 길을 내는 게 아니라 다만 흐를 뿐이었다. 물을 흐르게 하는 원기에는 분별과 가림이 없다. 바위는 피하고 나무뿌리는 우회하고 뻘밭은 가까이 하지 말고 붉고 단단한 황토를 찾아 길을 나서라는 분부가 있던 게 아니다. 물은 그 어떤 질료도 가리지 않고 높이를 뒤로하고 낮은 곳을 향하였던 것이다. 나그네가 있다. 그 나그네는 왜 길을 나서야 했는지 지금에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절실한 사유로 길을 나섰을 것이다. 필름이 끊기면 복원하는 데 여러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듯이 세월의 때를 벗겨 보면 그렇다. 물을 마셔야 했고, 물길을 따라 걸어야 편안했을 것이다. 걸을 수 없는 물길에서야 잠시 헤어져 걸으면 된다.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이를 뒤로한 채 산을 나서고 들을 찾아 사람들과 해후하고 모두의 관심이 끊어진 어느 곳에서 바다와 만나게 되는 물은 나그네를 키우고 쉬게 하고 쓰다듬어 주는 위안인 것이다. 나그네의 발길은 물에 의해서 가벼워지고 평온해진다. 생각해 보라. 물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과 물길을 거슬러 걷는 것의 의미를. 그렇게 길을 나선 나그네들의 발에서 길은 완성된다. 사람의 신체 일부분이 길을 낸 것이다. 길이란 그렇다. 사람의 몸으로 만들어낸 것이 길이다. 숲과 자연은 사람의 답압에 의하여 눌러진 피부를 기억해놓고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그 다져진 피부를 걷게 한다. 나그네는 가늘고 약하게 눌러진 길의 흔적을 따라 자신의 흔적을 또 남긴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나그네와 길을 나선 이들의 기억 속에서 길은 존재한다.

2. 차량과 도로

도로는 길과 다르다. 길이 사람의 신체 일부분에 의한 답압과 기억에 의존하지만, 도로는 기구를 이용한다. 토목기술과 장비와 사람이 만들어 낸 기술의 총체가 도로에 집약되어 있다. 도로의 발달은 산업의 발달을 의미하고, 도로의 정비를 사통팔달 신경망의 연결이라 말하기도 한다. 차량은 잘 발달된 도로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차량과 도로는 나그네와 길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도로가 길은 아니다. 옛길을 답사한다고 나선 영남대로도 그렇다. 도로와 도로의 연결망을 통해 영남대로 근처까지 와서는 차량을 두고 사람만 빠져나와 그 옛길을 걷는다. 신체의 일부분에 의한 답압과 기억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옛길을 옛사람을 그리며 걷는다. 걸으면서 옛길과 옛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3. 옛길과 도토리

하늘재에서 중원 미륵사지까지 걷기로 했다. 그 길은 옛길이라기 보다는 요즘 흔하게 만나는 등산로와 다를바 없다. 등산 하는 사람들과 섞이어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오랜만에 만난 다랑쉬 회원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답사 곳곳에서 조용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누가 없으니 너무 조용하다. 조용해서 좋다. 아쉬움과 함께 빈정댐도 함께 한다. 둘 다 고개를 끄덕여 준다. 나는 도토리를 줍기 시작한다. 송국종이가 따라 한다. 내 주머니와 종국이 주머니가 두툼해지기 시작한다. 다람쥐 겨울 먹이를 가로채지 마라고 누군가 말한다. 때까치의 먹이인 줄은 왜 모를까. 우리나라 산림은 참나무류의 상태에 있다. 소나무가 산꼭대기로 밀려올라가고 있다. 소나무 천지였던 조선의 산림이 이제는 참나무류의 임상으로 바뀌고 있다. 생태계의 천이에 근거하면 극상 상태를 앞두고 있는 셈이다. 그 기간이 오래이겠지만 서어나무나 단풍나무로 대표되는 극상 상태에 이르면 산림 생태계는 매우 안정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소나무는 국화과의 식물들 처럼 타감작용이 있다. 그래서 소나무 아래를 보면 묵은 소나무 잎들만 가득하고 다른 식생이 들어와 있지 않다. 이렇게 주변에 다른 식물이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소나무의 오만과 독선이다. 그래서 나그네는 소나무 아래에서 쉬고 소나무 관솔가지를 잘라 불을 지피고 했다. 소나무와 한국인의 관계는 보통 깊은 게 아니다. 이런 텅 빈 소나무 아래에 다람쥐는 도토리를 저장한다. 때까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다람쥐보다 때까치가 더 부지런하다. 나는 놈과 기는 놈의 차이다. 이들이 도토리를 저장할 때는 잘 보이는 곳, 찾기 좋은 곳에 저장한다. 그런데 눈이 오면 한꺼번에 후각을 잃고 만다. 그렇게 놓친 도토리는 눈에 의해 수분을 확보하고 있다가 봄이되면 내처 싹을 틔우고 만다. 소나무 아래 운동장은 그렇게 잃어버린 식량들이 쑥쑥 자라 올라온다. 잠시 멈칫대다 소나무 가지의 빈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면서 하늘을 장악한다. 햇빛을 가리고 소나무는 서서히 말라 죽기 시작한다. 소나무는 자기 품에 배신의 싹을 잉태하고 만 것이다. 오늘도 다람쥐와 때까치는 여전히 도토리의 절반 이상을 잃고 산다.

4. 중원미륵사지와 온달장군의 공깃돌 바위

와 보았던 곳, 그래서 깜짝 놀란다. 출발점이 달랐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만남이다. 반가웠고, 언제 왔었더라?로 시작되는 텅 빈 기억의 회로에 넌저리를 친다. 아예 생각해 내지 않기로 한다. 내 기억의 회로는 답압이 제대로 안된다. 한 번 밟아 주었으면 다시 그 길을 따라 한 번 더 밟아 주어야 하는데, 나는 일반적으로 한 번 밟아 준 길은 무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피해 걷는다. 그러니 답압과 답압으로 단단해지는 기억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좋다. 주어진 상황에 실핏줄은 늘 잘 터지고 있다. 이것이 이런 것이고, 저것이 저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삼가해도, 다른 사람이 훌륭한 기억을 바탕으로 이것과 저것을 분별해 줄 때, 저것은 맞고, 저것은 아니고, 저것은 확실하고, 저것은 지어낸 거짓이고 하는 분별과 판단만큼은 정확하다. 다시 보는 미륵의 얼굴, 그리고 일직선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성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려준다. 미륵의 눈으로 바라보니 탑을 지나 멀리 산까지 일품의 풍경이다. 옛길 영남대로를 걷던 사람들에게 이곳은 어떤 의미였을까? 형식으로는 불교를 배척하고, 마음으로는 불교에 기대던 조선의 선비들이다. 그 선비들에게 이곳 미륵은 지금처럼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그 흔적만으로도 과거 시험의 행불을 의지하게 하는 역할로 일부로 찾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온달장군의 공깃돌 바위를 보면서 옛사람들의 해학을 느껴본다. 복을 달라는 기복이후 멋적어서 웃으면서 속내를 숨기자는 것일까. 기복이라는 것은 절실한 것인가. 숨겨야 하는 것인가. 그조차 멈칫대며 허허롭게 웃고 말아야 할 것인지 모른다.

5. 옥소 권섭 선생

참으로 문경이라는 곳, 문희라고도 했다는 이곳, 흥미롭고 놀라웠다. 경상도의 소리가 들리는 곳, 기쁜 소식이 들리는 곳이라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지만, 유교 문화관을 들린 것이 그 단초가 되었다. 부훤당 김해의 말을 메모한다. "나태는 천하에 악덕이라 사지가 건강한 사람으로서 어찌..." 늘 그랬다. 내 사는 모습이다. 나태를 내몰아치고 살다보니 뒷목이 땡기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직업이 교사이고, 전문계고등학교 교사이다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해 내야 한다. 젋었을 때의 교사와 나이 든 교사와의 격차는 매우 크다. 처음 시작하던 스무살의 나와 지금 내 나이가 다를 게 없다. 하는 일이 똑같다. 누구를 시킬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똑같이 교사다. 옥소 권섭 선생의 그림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절판되었지만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은데]라는 책이 있기도 하다. 옥소 선생의 그림을 보고 검색하니 옥소고라는 선생의 문집이 모두  17권짜리로 나와 있는데 100여만원이 넘는다. 문경을 중심으로 여행을 다니고 시조를 쓰고 소설을 쓰며, 심지어는 음악까지, 풍수에 대한 남다른 해석까지 매우 폭넓고 깊은 삶을 사시다 간 분이다. 처음 접하는 분이지만 조선 중기 이후의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과 자세를 견지하신 분이고, 이분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었다. 특히 문경 주변의 풍경을 그린 문경 유교문화관의 그 그림을 구하고 싶다. 사진이라도 찍었을 것을 후회된다.

6. 향음 주례

매년 음력 10월 길일에 향음 주례를 한다고 했다. 너른 곳에 독상을 받고 앉아 있는 그림만으로 환상적이었다. 존경과 사양, 정결과 청결, 화해와 합심, 검소와 경로 및 음양과 오행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리다. 술로 인해 정신과 몸을 놓지 않으려는 지혜를 나타낸다. 10월 길일에 다랑쉬 향음주례를 문소장님이 제안한다. 그 자리에서 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방화수류정]을 떠올린다. 저기 앉아서 다랑쉬 향음 주례 행사를 해 볼 참이다. 향음 주례에 근접한 근기와 자격을 갖춘 사람을 청하고자 한다. 향음 주례의 시작은 먼저 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의와 절차를 지키며 술을 마시던 잔치이다. 옛것을 알아야 현대에도 제대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절실하게 통감한다. 자칫하면 향음 주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떠올린다.

7. 전통 다례 시연 및 체험

(사) 한국차인연합회 문경 다례원 원장 고선희 선생은 문경을 이렇게 한 마디로 말했다. "사람과 자연이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말이다. 마침 그는 수원의 시상 강무강 시인과 함께 공부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주흘요의 월파 이정환 선생도 그 둘의 관계를 말한다. [한국차인연합회] 대학원 4기들이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한다고 한다. 한국다도대학원 제 4기 학생 주소록을 보니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을 본다. 월파 선생이 정확하게 기억해 내고 있다. 이 나라에는 몇 개의 차 관련 협회가 있다. http://www.teaunion.or.kr 에서 볼 수 있는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가 그 중 하나다. 예전 국회의원하시던 박권흠씨가 회장으로 계신다. http://koreatea.or.kr/ 한국차문화협회가 또 그 중 하나다. 무형문화재 제11호 규방다례 기능보유자로 이사장을 하는 분은 이귀례씨다. 여기서는 한국 차문화 대학원을 운영한다. 주흘요에서 문소장님과 차를 대접받고, 기어코 [우리집 가풍은 밤에 찾은 손님에게는 곡차를 대접한다.]는 말까지 들었건만 무산되는 일을 겪으면서 그 호사는 마치게 된다. 그러나 또 하나의 기연을 만난다. 효당 본가 반야로 차도 문화원을 알게 된다. 수원지부 화향선차회에서 고향순 지부장님을 만나 차 따르는 모습이 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그 차를 세 시간 정도 마시게 된다. 이번에 함께 답사를 하지 못하였던 수제자 원옥희씨의 안내로 찾아갔던 곳이다. 마지막에는 술잔을 기울여 술맛을 감별하기까지, 내가 왜 술맛을 보는데, 화향 선생의 감탄과 칭찬을 자아내게 했는지 그것이 후회스롭다.

8. 나그네와 물과 길과 도로

나그네는 없었다. 굴을 파 놓은 곳에서 비를 피하다 이루어진 인연과 그 인연을 따라 떠돌다 다시 비를 피하며 만나야만 했던 인연이 남았다. 그리고 그 앞 정자에서 송정석씨의 진도 아리랑, 살짝 듣고 말았지만 마치 거목의 소리처럼 알차고 근기 있는 노래였다. 제대로 멍석깔고 들어 보았으면 좋겠다. 주막원터에서 김시습을 만난다. 그 길 내내 문소장님은 황토길에 대하여 풀어 놓는다. 왜 그 때, 김지하 시인의 황톳길을 말하지 않았을까.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나는 간다 애비야.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 모든 세월은 황톳길에 희망을 담고 나는 간다 애비야.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로(시 전문을 재구성함)] 그렇게 나그네도 물처럼 흐르고 세월도 길에 밟히고 이제는 도로만 남아 물도 길도 나그네도 모두 도로에서 만나고 만다. 걷는다는 것은 대단한 사치며 문화가 되고 말았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의 티켓을 끊어 공연을 보러 가는일보다 어딘가 행선지를 정해 놓고 걷는 일이 더 큰 문화적 티켓 행위이거나 이벤트가 되고 만다.

2008.10.04 토요일 아침.

2010년 6월 한국주택관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