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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나무의 품위

by 나무에게 2013. 12. 24.

나무의 품위


 

나무에게는 품위가 있다. 어떤 나무든 자기 자신 고유의 수형을 지녔다. 그런 나무들이 심겨진 환경과 사람들의 간섭에 의하여 조금씩 모양이 달라진다. 나무의 수형은 긴 세월을 살면서 전해 내려온 유전 요소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다. 일반적이고 대체적인 특정 나무의 수형을 그 나무의 품위라고 말하자. 최근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인간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하면서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죽어가는 한 인간 개체의 내적인 의지가 있다. 한 번 병원에 들어가 묶이고 호스 끼우면 환자의 의지는 없어진다. 그래서 유언을 미리 써 놓고 내가 어떤 상태가 되면 어디까지는 치료하고 어느 상태에는 치료하지 말라고 분명한 의사를 밝혀 놓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죽어갈 때 최소한의 인격적 품위를 가지고 가겠다는 의지이면서, 어느 상태에서든 생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다.

나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형태를 유지한다. 숲의 나무와 도시에 심겨진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나무일지라도 숲에서는 곧은 줄기를 가지며 우람한 체형으로 자라지만, 도시에 심겨진 나무는 짧은 줄기와 굵고 낮은 가지를 가진다. 제 고유의 수형에서 벗어나 있다. 사촌끼리는 그래도 닮았다고 하는데 전혀 닮아 있지 않은 수형으로 살아간다. 나무가 자신의 수형대로 사는 것을 나무의 품위라고 말한다. 나무의 품위라고 할 수 있는 나무 고유의 형태는 사람의 의도에 의하여 모양을 바꾼다. 나무는 제 스스로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숲에서 자란 나무들은 일정 크기에 도달하면 제 스스로 가지를 마르게 하여 툭 떨어지게끔 한다. 그러면서 고유의 모습을 만든다. 사람은 나무에게 관심이 많다. 관심은 곧 간섭을 일으킨다. 사람이 나무에게 보이는 간섭은 가끔 무모하다.

나무를 전정하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나무를 전정해야 할 부분을 말할 때, 역지逆枝, 교차지交叉枝, 도장지徒長枝, 내향지內向枝, 하향지下向枝, 맹아지萌芽枝, 평행지平行枝, 돌출지突出枝, 고사지枯死枝 등을 내건다. 전정의 뜻은 뭘까? 나무를 심어 놓고 사람이 정해 놓은 목적에 맞게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건전한 생육과 모양을 유지하기 위한 전제가 앞선다. 사람이 만들어 놓는 목적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 아름답게 하자는 것이고 둘째, 실용적이게 하자는 것이고 셋째, 꽃피고 열매 맺는 생리적인 조절을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뜻과 목적이 있어도 결국 나무의 생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면 뜻과 목적은 상실되고 만다. 나무의 생장 원리를 알아야 하고, 나무의 고유 수형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아무 때나 전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잘라지는 가지와 줄기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간섭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정말 아름다운 나무를 원한다면 그 나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자주 보아야 한다. 물론 나무마다 모습과 살아가는 방식과 전개되는 가지와 잎의 형태가 다르다. 그러니 세상에 볼 것이 얼마나 많은가. 가끔 사찰에서 향나무를 보게 된다. 향나무는 사찰 뿐이 아니라 마을의 우물가에도 있었고, 사당에도 심었으며 궁궐에도 심었다. 향을 피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국의 향나무는 모양을 만들기 위하여 가지와 잎을 정리하면서 수형을 만들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향나무가 관공서 등에 많이 심어지고 수형을 정리하는 전정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직 사찰의  향나무는 전정을 하지 않고 그냥 두어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 다행이다. 그렇지만 일주문 전후의 사찰 입구에 일본 나무인 가이즈카향나무를 줄지어 심어 놓은 것은 못마땅하다. 그것도 경비를 들여 인공수형을 만들고 유지하면서까지. 사찰에 심는 나무 역시 근본 있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사찰 자체가 문화재 아닌가. 여기에 울긋불긋 왜성철쭉을 심어 놓고 좋아라 할 수 없잖은가. 은은한 색, 단아한 꽃을 좋아했던 선조들의 심성이 지금 이토록 흐트러지는 것도 이와 같음이다.

나무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어체계를 지니고 있다. 가지가 잘리면 잘린 가지를 새살로 싸서 감쪽같이 방어해내는 기작을 지녔다. 그런데 나무의 생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전정은 그렇지 않다. 잘라내야 할 선을 지켜야 하는데, 그 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잘라내는 것이다. 잘라내야 할 가지의 선을 가지깃이라고 한다. 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바람이 잘 통하여 선선하고 시원하며, 햇빛이 필요한 량만큼 닿고, 그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그만이다. 품위를 지킨다는 것이 이처럼 단촐하고 소박하다. 예쁘게 잘라주고 다듬어달라는 게 아니다. 나무 스스로 제 모습을 가지고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자신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하면 된다. 나무의 생리는 방어체계와 같은 말이다. 오히려 그 방어체계를 건들면 나무가 죽는다. 왜 죽었을까 생각하는 우둔함이 발생한다.  나무 개체마다 위치가 다른 가지깃도 찾아내지 못하면서 마냥 관심만 퍼붓는 형국이다. 왜 전정하는지 무엇때문인지도 알면서 막상 잘라야 할 가지의 위치를 잘못 짚는 것이다. 가위와 톱이 있고 자르면 전정인가. 목탁만 있으면 염불이 되는 것인가.


(월간 용주사보 [화산] 200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