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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소나무 다시 읽기

by 나무에게 2013. 12. 24.

소나무 다시 읽기 / 온형근


 

사람들에게는 고향이 있다. 고향이 지금 살고 있는 곳 그대로이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든 마찬가지다. 지금 사는 곳이 고향인 사람에게는 유년이 고향이다. 그 유년의 추억 중 꽤나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겨울이다. 겨울 풍경, 그때는 왜 하나같이 모두 추웠다고 말하는지. 매일같이 집안에서 노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놀이를 선택하던 시절이다. 방은 웃풍에 노출되어 바람이 송송 들락거린다. 지금처럼 한 겨울 실내에서 바람 소리 하나 듣지 못하는 일상에서 되살리고 싶은 추억이다. 그러면서 봄이 몇 번씩 지나가고, 주변 사람들은 바뀌고 세상도 달라졌다. 변하지 않는 것은 문화로 자리잡은 지역적인 선입감 같은 것들이다. 평안도 사람은 어떻고, 강원도 사람은 어떻고 제천 사람은 어떻고 하는 속성들이다. 이런 것들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소나무를 떠올린다. 지역에 따라 소나무가 다르게 나뉘어지고 그것은 곧 지역 기후 조건의 다름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고향도 결국 기후 조건에 적응하는 여러 문화적 속성이 모여서 하나의 틀을 형성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러한 지역에 따른 문화적 선입감들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소나무의 형태가 서로 다른 것을 고향의 특성으로 동북형, 중남부고지형, 중남부평지형, 위봉형, 안강형, 금강형으로 6지역으로 구분한다. 동북형은 함경도 일대의 소나무, 중남부평지형은 굽었지만 가지 넓게 퍼져 자라는 인구가 밀집한 지역의 소나무, 중남부고지형은 고지대에서 자라는 소나무, 위봉형은 전라북도 일부 지역에 자라는 소나무, 안강형은 경주와 안강 주변 가장 볼품없고 못생긴 형태로 자라는 소나무, 그리고 금강형은 줄기가 곧고 가지가 상부에만 좁은 폭으로 자라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소나무를 말한다. 이 금강송이 소위 강송이라 불리며 조선시대 궁궐의 재목으로 사용되던 소나무다. 물론 사찰의 재목으로도 가장 높게 쳐 주는 나무다. 이를 품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온다. 품종이란 여러 의미가 있다. 일정한 형질을 지니고 있으며 그 형질이 유전인자와 관계가 있을 때 그 형질을 지니고 있는 나무들을 품종이라고 할 수 있다. 종(species)보다 작은 단위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아직 품종으로 인정할 만한 유전적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입지품종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같은 수종이라도 그 지방의 입지, 환경이 틀리면 그 적합성이 달라져서 입지품종을 생성한다. 고향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객지에서 오랜 세월 살다보면 그 사람의 입지품종이 달라진다. 금강소나무가 그렇다. 금강소나무가 사는 곳은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다. 강우량이 많고 습도 또한 높으며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소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갈색 산림 토양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주 인근 지역의 안강형 소나무는 굽고 빈약하여 볼품이 없다. 어떤 사람은 이게 한국 소나무를 대표하는 형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손쉽게 볼 수 있는 소나무라 그럴 수 있다. 통직한 금강소나무의 숲을 볼 기회는 많지 않다. 한편, 신라 1,000년 동안 신라의 궁궐과 사찰과 집에 곧고 좋은 소나무만 골라 사용하는 일이 계속된 결과라고 문화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근 100㎞쯤 떨어진 경상북도 청송의 소나무와 경주의 굽은 소나무의 형태가 매우 심하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전국의 소나무 씨앗을 채취해 특정 장소에서 산지 시험을 해 본 결과 안강형 소나무의 씨앗에서 나온 소나무는 굽은 형태를 보였고, 다른 지역은 모두 곧게 자랐다고 한다. 곧 유전적으로 나쁜 형질은 고정되었는데, 금강송처럼 뛰어난 소나무의 묘목을 각 지역에 심었을 때 어미나무처럼 뛰어난 형질을 가진 나무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좋은 형질이 유전적으로 고정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지역 산지에 따라 나무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지역의 소나무도 금강송이 자라는 지역의 환경과 유사하게 조성하여 기르면 금강송처럼 곧고 재질이 치밀한 소나무로 기를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러나 기후, 지질 같은 자연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무리수다. 사람이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여 능숙하게 그쪽 문화에 적합하게 살아가듯 소나무도 결국 산지에 적응하여 적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고려 이후, 조선 시대까지 이 국토에 지천이었던 소나무들이 점점 참나무류에 밀려 산꼭대기로 올라가 있다는 것은 딱하다.

소나무는 나무의 으뜸으로 친다. 소나무의 어원을 그렇게 풀이한다. 솔나무에서 솔은 우두머리를 말하는 수리가 변했다는 주장이다. 한자인 松도 진시황이 갑자기 만난 소나기를 소나무 아래서 피하고는 고마워 나무에 공작 벼슬을 주어 木公이라 하여 松자가 되었다 한다. 公侯伯의 순서로 대접받는데 그 중 첫째인 공에 해당하는 훌륭한 나무라는 것이다. 소나무는 곧 한국의 문화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 생활과 문화에서 소나무의 목재, 잎, 껍질 등 사람과 밀착되어 활용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그만큼 주변에 많았던 나무이고 신성하게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나무가 산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예전에 땔감을 채취하며 살던 시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나무 밑에 자라던 참나무류나 소위 잡목이라고 하는 것들을 베거나 긁어 땔감으로 사용하던 사람의 적절한 간섭이 소나무를 살게 한 것인데 그런 사람의 간섭 행위가 없어지니 참나무류에 밀려 소나무가 서 있을 곳이 없게 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적절한 간섭이 필요한데, 이보다 앞서 소나무에 대한 대접부터 달라져야 할 것이다.


(월간 용주사보 [화산]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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