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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멀리 있는 풍경들

by 나무에게 2013. 12. 24.

 

 

멀리 있는 시간들이 있다.
멀어서 보이지 않다가 가끔 손에 잡히듯 가까운 시간에 놓인 그런 시간들이다.
2002년 9월1일의 풍경이다.
 
멀리 있는 산에는 주름이 없다.
멀리 있는 물에는 물결이 없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눈이 없다.
 
이는 없어서가 아니라 없는 듯 보일 뿐이다.
 
산을 높게 그리고자 하거든,
전부 드러나게 하면 높아지지 않는다.
안개와 노을이 그 허리를 두르고 있으면 높아진다.
 
물을 멀게 그리고자 하거든
전부 드러나게 하면 멀어지지 않는다.
가려서 그 물줄기를 끊어 놓으면 멀어진다.
 
산은 그 허리를 감춤으로 높아진다.
물은 그 굽이를 단절시킴으로 멀어진다.
산이 전부 드러나면 빼어나고 우뚝하며 높은 형세가 없다.
다만 디딜방아의 방앗공이와 다를바가 없다.
물이 전부 드러나면 돌고 꺾이면서 멀리 흐르는 형세가 없다.
다만 지렁이를 그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상을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이 그렇다.
많이 알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저 돌아가는 형세를 더듬을 수 있으면 족하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내가 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멀리 두려면 주름을 없애고, 물결을 없애며 눈을 그리지 않는다.
드러나게 하지 말고, 안개와 노을이 가려지게 하며,
가리고 끊어야 한다.
가깝게 두는 것보다 잃은 줄도 모르게 멀리 두는 것,
이것이 그리움이고 기다림일 것이다.
멀리 둔 것으로 내 안의 풍경이 가득할 때쯤이면 형체가 지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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