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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갈매나무

by 나무에게 2013. 12. 24.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갈매나무
                                    

온형근 | 시인, 여주농업경영전문학교 조경연구실

 

갈매나무의 학명은 람누스 다부리카Rhamnus davurica Pall.이다. 갈매나무과에 속하며, 대추나무가 이에 속한다. 일명은 チョウセンクロツバラ이고, 영명은 Davurian Buckthorn이다. 갈매나무는 백석의 시「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의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전해주는 삶의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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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석

 

어느 사이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라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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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이 없다.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춥다. 결국 헤쳐 나가야 할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혼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혼자 생각하는 것들은 대개 그렇다. 내 자신에게로 깊게 천착하여 들어간다. 슬픔과 어리석음과 가슴 메임과 뜨거운 눈물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다 보면 내 뜻과 마음으로 세상이 되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혼자 틀어박혀 여러 날 지나면 부재의 시대에 스스로 만들어 낸 세상의 티끌들은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그 많던 것들 중에 딱 하나, 외로움만 남겨질 때쯤에야 인식의 지평이 활짝 열린다. 한겨울 혼자 내리는 싸락눈까지 친구하자 문을 두들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내 마음에 굳고 정한 나무로 새겨 놓은 갈매나무의 마른 잎새까지 떠올린다. 기어코 쌀랑쌀랑 싸락눈을 맞을 지상의 세계로 인식이 확장된다.

신의주 어느 집에서 백석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미지화 되어 그대로 재현된다. 긴 호흡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로 귀착된다. 왜 백석은 갈매나무를 굳고 정하다고 하였을까? 갈매나무의 수피는 암회색으로 무늬가 옆으로 나며 가지 끝이 가시로 변한다. 낙엽활엽관목으로 높이 5미터까지 자란다. 중국과 일본에도 생육하는 나무다. 잎은 마주나며 긴 타원형이다. 잎끝은 점점 뾰족해지며 잎밑은 좁은 각도로 마감된다. 가장자리에 둔한 잔 톱니가 있고 양면에 털이 없거나 엽맥에 털이 있으며 뒷면은 회록색이고 잎자루는 길이 6-25mm이며 잎자루 아래 작은 탁엽은 가늘고 빨리 떨어진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관심을 가지고 번식하여 조경수로 개발하면 잘 적응할 수 있는 생태적 특성을 지녔다.

갈매나무에 해당하는 나무는 많다. 백석이 말한 갈매나무가 이 중 어느 것일지 알 수 없다. 갈매나무(이명:참갈매나무), 까마귀베개(이명:헛갈매나무), 돌갈매나무(이명:산갈매나무), 연밥갈매나무, 좀갈매나무(이명:섬갈매나무), 짝자래나무(이명:갈매나무), 참갈매나무, 털갈매나무 등이 있다. 하지만 어떤 나무이든, 신의주 지방에서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나무여야 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녔어야 한다. 다만, 굳고 정하다는 말 만으로도 갈매나무는 내 가슴 가득 채우는 힘이 있다. 살면서 굳고 정한 나무 하나쯤은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어쩌면 내게도 굳고 정한 나무 하나가 오래전부터 심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 형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일수도 있다. 안개처럼 흐릿한 그 나무의 가지와 잎이 명료해지고 꽃도 피워내고 그리하여 마침내 환한 실재의 나무에 닿아 있게 될 것이다. 나를 대신할 수있는 나무 하나 키워내는 일조차 부재의 시대에 큰 호사임에 틀림없다.
(다시올문학, 2009 겨울호, 권두산문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