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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덩굴손이 수줍다

by 나무에게 2013. 12. 24.

담쟁이덩굴의 자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자라 있다. 관심 밖으로 놓여 있다 빨갛게 가을을 수놓을 때쯤 털커덕 눈에 잡힌다. 그새 뜨거운 벽과 함께 익었던 인내가 쏟아지는 듯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생각의 크기도 저렇듯 담을 넘어야 한다. 경계에 머물렀는가 싶었는데 이미 저만치 월담의 경지에서 환하게 웃는다. 성큼거리며 나아가진 않았지만 어느새 가슴 뭉클하게 다가와 있다. 아팠던 멍울자국들도 헤쳐 모이면 서로를 풀어내며 손을 아 주나보다. 뜨거워 뱉아내기 어려웠던 말들이 담을 넘는다. 갇혀 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꼭꼭 눌러 놓았던 속울음 꺼낼 수 있다. 곱게 물들어가는 잎새 안으로 열매가 익고, 아무도 모르게 기어오르던 덩굴손이 제 얼굴만큼이나 발갛게 수줍다.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