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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산꼭대기의 눈꽃과 비탈짐

by 나무에게 2013. 12. 24.

산꼭대기의 눈꽃과 비탈짐 /  온형근

경칩이라면 개구리가 기지개를 펴는 날이다. 산 아래에서는 조금 춥구나, 늦은 봄비가 오는구나. 정도로 날씨가 찬 날들이 이어진다. 며칠을 낮은 하늘을 덮고 산다. 토요일이 주는 가벼움은 낮은 하늘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대로 산행을 강행한다. 토요일의 늦은 시간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 오는 시간이다. 모두들 내려 오고 산은 그야말로 한적하다. 동료를 기다리는 동안 입구의 냇가를 가로지른 다리 위에서 오고 가는 종점 버스와 무료한 보여짐의 시간들이 지난다.

무료함이 이끄는 시선은 어쩌면 한량 없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없다. 그 무료함과 상념이 이끈 것 중 하나가 각인되어 있다. 다리 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어지럼증처럼 휘청거린다. 조그만 콘크리트 보에서 낙하하는 물들이 만들어 내는 환영에 취한다. 그것들은 거머리꼴을 하고 피래미처럼 헤엄치듯 날아다니는 것처럼 움직인다. 무엇일까? 실재의 무엇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살?은 아니다. 물결이다. 그냥 물결만은 아니다. 물결 무늬였다. 물결 무늬에 취해 있다.

살면서 아름다운 체험을 한다. 아름다운 체험이 있어서 사는 것에 무게를 얹는다. 물결 무늬를 본다는 것은 체험이다. 이런 체험 없이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은 없다. 주어진 시간과 체험은 항상 누구에게나 따르는 것이다. 내가 물결 무늬라고 무릎을 탁 쳤을 때, 물결 무늬라는 무형의 보여짐은 내게 존재가 되어 살아 있게 된다. 분명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존재하던 물결 무늬가 내 안에도 존재하게 된다. 이 작은 존재 하나만으로도 기쁨이 생기는데,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존재들은 얼마나 많을까?

그렇게 산에 오른다. 산은 젖어 있다. 오를 수록 젖어 있는 산은 발길을 가볍게 만든다. 몸이 무거워졌는지 가벼운 발걸음을 내는 데 의식이 개재된다. 그러나 등산화를 운동화로 바꾸어 신고 오른 만큼 가벼움은 있다. 애써 가벼운 발걸음을 지어 내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힘이 들어간다. 중턱에 오르면서 산길은 눈길로 바뀐다. 제법 흥미로운 산행이 되고 있다. 토끼재라는 명칭만큼이나 가파르다.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오르고 싶다. 앞서가면서 내내 토끼처럼 뛰면서 가파른 산행을 하고자 한다.

건성으로 '오를만 하다'며 연실 중얼거려본다. 가슴이 답답할 때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가끔씩 뒤돌아 동료를 본다. 올라온 산만큼 보이는 산들이 중첩되어 있다. 산등성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능선에 힘을 주어 누워 있다. 겹겹이 아득하게 포개어져 있다. 이불장에 이불을 포개 놓을 때의 기분만큼이나 마음이 뚜렷하게 위 아래를 자리 잡으며 정리되고 있다. 후련한 마음이 내 몰아친다. 눈길이 모든 신경을 정돈시킨다. 이제는 산행이 아니라 수행처럼 미끄러움에 몰두한다.

토끼재를 오르니 세찬 바람넘이재처럼 찬 바람이 가득 능선을 잇게 한다. 수관이 넓게 퍼진 소나무가 숱한 바람에 굴복하여 바람의 방향으로 퍼져 있다. 눈꽃이 가득펴 있는 산꼭대기의 풍경이다. 비탈진 소나무 수관을 따라 눈길을 주면, 여기가 어딘지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히말라야면 어떻고 광교면 어떤가 싶다. 금강이 있고, 백두가 있고, 한라가 있은줄 대수랴 싶다. 눈 앞에 전개되는 눈꽃 핀 나무들의 장벽에 내 시야는 온통 가려져 있다. 살면서 내 시야를 가리고 몰두하게 하는 것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능선을 따라 산행을 하는 동안 능선의 오르고 내림내내 미끄러움에 집착한다. 몸은 그렇게 긴장을 지닌다. 능선을 지나면서 만나는 능선 아래로 이어지는 비탈진 나무들에게 호락호락 정신을 빼앗긴다. 왜 이리 천박스럽게 눈꽃 가득 핀 소나무 군락만 보이면 혹하는지 모른다. 소나무처럼 타감작용이 강한 나무는 없다. 자기끼리 모여 살면서 다른 나무가 쉽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한다. 나무 중의 나무라는 참나무는 소나무를 쫓아내게 하는 유일한 집달리다. 그러나 눈꽃은 소나무에 핀 것이 훨씬 다양한 모양으로 다양한 상상력을 제공해준다.

활엽수에 핀 눈꽃은 활엽수처럼 밋밋하며 엇비슷하다. 그러나 소나무 하나에만 핀 눈꽃만 보아도 그 모양이 기기묘묘 다양하다. 솔잎 하나 하나에 눈꽃이 스며 달라붙어 있어 잔솔가지 하나의 모양만으로도 과히 디자인 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눈꽃의 모양을 깊이 있게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산꼭대기와 산 중턱과 산 아래가 이토록 서로 다른 형상으로 있다. 이런 날은 산을 오르는 내게도 여러 생각들이 함께 있어 벅차다. 때로는 조용했다가 시끄럽다가 주책처럼 흥분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산행 자체가 나를 취하게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