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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숲에서의 반성적 사유

by 나무에게 2013. 12. 24.

숲에서의 반성적 사유 / 온형근

여태까지는 숲을 왕복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도시의 산을 산책한다는 것은 산책 이상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약간씩 찢어진 균열 같은 것을 숲의 산책에서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돌아오는 길이 출발하는 길과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는 날은 처음이다. 그 틈을 알려준 것은 눈이다. 이마로 내리긋던 눈이 이제는 내 어깨를 내리친다. 내 이마는 내 걷는 쪽으로 내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사선을 긋고 지상에 내리고 있다. 나와 사선으로 평행을 이루며 만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진정 숲도 시작하는 길과 되돌아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눈이 그 틈을 벌려 준 것이다. 살면서 간혹 시작하는 길만 알고 되돌리는 길을 찾지 않으려 한다. 되돌린다는 것은 반성적 사고의 흔적이다. 되돌아감, 되돌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오로지 앞만 내다볼 수밖에 없는 단순적 사고방식에 마취된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되돌아보고 확인하고 반성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 이러한 반성적 사고야말로 인간을, 사람을, 나를, 다층적이고 고른 사색을 할 수 있게 한다. 여기저기 찢어진 균열의 틈새를 메울 수 있는 어떤 장치와 힘과 요소를 찾게 해준다.

시작하는 길과 되돌아가는 길을 함께 지니는 것이야말로 숲길을 걸으며 멋지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반성적 사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숲에서의 반성적 사유도 숲을 떠나서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조각, 단편화된다. 도대체 숲에서의 사유가 무엇이었는지 가물거리며 잠시 후 파편조각이 되고 만다. 그것을 모아 조각보처럼 깁는데에도 시간이 지나면 가능해지지 않는 작업이 되고 만다. 결국 사유는 집중적으로 사색할 수 있는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훈련은 시간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숲의 산책은 사색의 훈련을 강화시켜준다. 생각이나 화두가 끝까지 사색으로 이어질 수 있는 끈질긴 원시적 에너지를 숲은 지니고 있다. 그럴 때 사색은 깊어지고 사유의 시간은 확장된다.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숲에서의 사유는 일상적인 것들의 만발함에 쉽게 꼬리를 내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믿고 있다. 내 사유는 일상적인 것들의 만발함 앞에 꼬리 내리면서 하나씩 옅은 색을 칠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단지 그것이 엷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색을 입히기 위한 색깔의 층을 두텁게 하기 위한 하나의 풍경을 두텁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것들에게 꼬리 내린다. 내 사색과 사유는 서서히 옅은 색이 덧칠해져 언젠가는 커다란 하나의 풍경을 이룰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산책과 사색과 사유를 마치는 숲 초입길에 접어든다. 숲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서 강한 바람이 눈과 함께 거슬러 흘러오고 있다. 차다. 아주 찬 기운이 적셔진다. 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겉옷과 몸 사이 간격에 자리잡은 속옷이 달라붙어 있다. 걸을 때마다 속옷이 몸에서 이탈한다. 수시로 찬기운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

도로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층을 만들고 있다. 한꺼번에 녹지 못하고 계속 내리는 눈으로 인해 젖은 눈이 쌓이고 있다. 미처 채 녹기도 전에 줄기차게 눈이 선명한 색으로 내리고 있다. 날이 더 차지면 녹아서 물길을 이루는 물과 함께 얼음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얼음이 가득한 길이란 일상에게 아주 느린 하루를 안겨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느려질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의 끈이 늦추어질 때 반성적 사유가 시작된다. 오늘 술집은 넘치겠다.

달빛은 사라지고 새벽의 빛이 쑥쑥 밝히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달을 찾았으나 달은 보이지 않는다. 초롱초롱 샛별이 보인다. 숲 사이에 달빛도 별빛도 이미 사라졌다. 그림자로 우후죽순 교직하며 비추는 나무들이 새벽 아침 햇살을 받아 뚜렷한 형상으로 우뚝 서 있다. 자신의 둥치를 뽐내고 있다. 마른 나무 숲 사이로 수직의 나무들이 숨쉬고 있다. 좁은 산길에서 숲을 가르는 나무를 만난다. 숲은 조그만 산길을 내주고 있다.

오늘은 몸이 매우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