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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리기다소나무 숲으로

by 나무에게 2013. 12. 24.

리기다소나무 숲으로 / 온형근



작은 산으로 나서다 보면, 리기다소나무의 미끈한 허리와 자주 마주치게 된다. 야트막한 산을 따라 이어지는 리기다소나무가 그래도 한 겨울의 산행을 예쁘게 해준다. 나무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어떤 명목이라도 베어내고 옮기고 하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자리를 옮겼을 때 야생의 나무는 큰 몸살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생명을 어렵게 이어가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람이 평생을 아파하며 살아야 하듯 나무도 제자리를 떠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 겨울의 아침 햇살이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숨어 들어오는 늦은 하산길은 그 광경이 자못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리기다소나무는 소나무와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나무에게 몹쓸 나무 운운하며 나무마다 자기류의 가치를 매길 수 있겠는가?

나무를 바라보며 가까이 함에 있어서 가장 심했던 것은, 좋고 나쁜 나무의 내 가치판단에 의한 구분이었다. 어떤 나무는 종자를 채취하여 파종하여 묘목을 길러내고 싶은 강한 충동이었고, 또 어떤 나무는 심어져 있는 나무도 캐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도 패션이라며 유행은 시대와 가치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조경수목의 패션적 요소를 강조한 셈이다. 일제를 거치면서 아까시나무가 철도 침목, 목재의 재질, 땔감, 아름다운 꽃 등으로 이 국토를 선풍적으로 몰고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의 제도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향나무류에 대한 선호는 대단하였다. 아직도 그 향나무 선호의 흔적은 전국토의 관공서나 학교 건물마다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꾸준히 나무 이름에 영어나 일어 문자가 그대로 사용되는 마로니에, 메타세쿼이아, 라일락, 모미지단풍 등이 선호되었었던 것이다.

어떤 수종이든 자기류의 삶이 분명하고 바라볼수록 그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사회생활로 세월을 보낸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류의 삶의 방법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처럼의 과정을 통해서 나무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 때문이다. 결국 비슷한 과정에 놓이게 될 것이다라는 과정론적인 판단이 든다. 그렇게 리기다소나무를 만나게 되었다. 사실은 산행길에 큰 키로 작은 언덕을 가려주는 리기다소나무와의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된 것은 다분히 의식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 리기다소나무로 조경을 한 곳이 있다. 조선일보 사옥 조경이 그렇고 서울역 앞 새로 지은 연세빌딩 조경이 그렇다. 군식으로 집단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아름다움과 싱싱함이 이곳이 서울이라는 찌든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산책하는 북성산 자락의 산세라 느낄 정도로 볼만하였다.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 리기다소나무를 1999년 여름이 한창일 때 학교 실습장 주변에서, 학교 건물 3층 높이에 달하는 규격을 학생들과 실습으로 캐서 옮겨 심었다. 대단한 경험이었다. 나무가 커서 장비도 많이 동원되었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학생들과 나는 이 경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실습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습을 하는 순간 학생들을 포함해 나까지, 아니 나를 아는 모든 이들까지 그 일의 일회성에 대하여 의심한 사람은 없었을 정도로 벅찬 과정이었다. 어른이 아닌 고등학생들과 일에 서툰 내가 만나 만들어내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행정적 지원이 미흡하여 그게 더 힘든 일이었다. 생색을 내며 구색 맞춰주는 행정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작에 고통이었고 진행의 부드럽지 못한 차질 등을 접하며 착수한 것이다.

나중에야 그 일의 규모와 형식을 알고 내가 하는 일의 진정성을 알고 도와주었다.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시작의 갈등과 외로운 추진은 상당히 힘든 과정이었다. 그 해 여름 태풍과 장마는 리기다소나무의 새 뿌리를 잘랐다. 아직도 아쉬운 것은 그 작품이 사진으로만 몇 장 남은 안타까운 작업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본관 건물 앞의 리기다소나무의 정형적인 디자인은 사진으로만 남고 다시 그 자리에 반송이 들어서게 되었다. 완벽한 디자인의 교체였다. 이미지의 반전이었다. 학교 앞 정원 이미지의 반전처럼 내 삶의 이미지도 많이 수정되었다. 수정, 변화, 재창조의 내적 갈등과 사유를 통하여 2000년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숲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다. 숲이 지닌 이미지를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해 여름 이후의 생활은 꽤나 힘든 역정이다. 낭인 같은 몰골로 숱하게 남한강변으로 나돌며 자신을 내몰아대던 한 해 끄트머리의 방황이 아직 내 몸에 근질거리며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해 그러한 방황을 내가 즐겼는지도 모른다. 허전한 사람은 숲으로 들어 숲의 속삼임과 내밀한 의미를 찾아야 할텐데, 그때 나는 주로 강변에서 강과 철새들의 속삭임을 마셨던 것 같다. 헤어날 길 없는 자연에의 이끌림이기만 했다. 리기다소나무 숲으로 들면 그 짧은 여름 숲에서의 한 달여가 끔찍하게 생각날 것이다. 리기다소나무 숲에서의 생활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되어질지, 못내 아쉽기만 한 그 해 여름의 꿈같은 여정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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