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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아~,,,! 네."와 "꿩 잡는 게 매"

by 나무에게 2013. 12. 24.

 “아~,,,! 네.”와 “꿩 잡는 게 매” / 온형근

 

한 시절 같은 일과를 지니고 소박한 관계를 형성하며 어울리고 뒹굴고 뭔가를 만들거나 그러한 준비를 하던 시절이 학창시절이다. 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교제를 하고 관계를 만들어가기에 학교시절이라는 말보다 학창시절이라는 말이 훨씬 심정적으로 어울린다. 평생 가지고 다니는 ‘79학번이라는 숫자성 어떤 암호, 나는 ’79학번이다. 그 숫자에 빼기와 더하기를 하면서 그 이전의 학창시절, 이 이후의 사회생활을 거듭 계산하곤 한다. 워낙 숫자 개념을 의식적으로 싫어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커다란 선비의식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다만 몇 안되는 부친의 말씀 중에 “사내는 친구를 사귀거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너무 숫자(돈)를 따지면 운치가 없다.”는 가르침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울리지 않게 오랫동안 내 안에 자리 잡을지는 몰랐다. 그런 내게 ‘79학번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고 기억에 자리 잡은 몇 안되는 숫자 중 하나인 것이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 후 복학하였을 때 놀랐던 기억이 난다. 84년 2학기 때 복학하였는데, ‘79학번 중 절반이 복학생이었다. 그 사실은 놀기 좋아하는 내게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1980년 겨울, 2학년 2학기 교련 교과 기말 고사 추가시험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고향인 제천에 내려가 있다 연락이 되지 않아 불응시 처리로 F가 되었다. 이게 복무 단축 4개월을 통째로 막았던 사유가 되어, 동기들 보다 한 학기 또는 두 학기 더 늦게 복학하게 되었고 1년 후배인 ’80학번 중 빠른 친구들과 졸업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복학하니 분주하고 바빴다. 나는 부전공으로 이수하는 임학과 수업보다는 농업교육과 수업 등 인문학적인 수업을 좋아했다. 그러니 임학과 수업을 많이 빠지고 그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다른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곤 했다. 그때 이용환 교수님을 만났다. 물론 복학 전에도 이용환 교수님을 만났지만, 복학한 1984년 후반기에 새롭게 만났다는 의미를 말한다.

대학원에 강대구와 서우석이라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강대구의 대학원 지도교수는 송해균 교수님, 서우석은 이용환 교수님이었다. 우석이는 그 당시 나와 사석에서 자주 만나 학창시절의 창을 통한 꿈과 이상과 미래에 대한 막연하지만 호기심 많고 다양한 관심사를 나누었던 시간들이 많았었다. 그런 과정에 이용환 교수님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오곤 했다. 그런 일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교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용환 교수님은 키가 크신 분이다. 그런데 걸으실 때 보면 휘청거리듯 걸으신다. 뻣뻣하게 걷는 내 걸음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허리를 펴고 척추를 곧게 세우면서 시선은 항상 상방 15도 위를 향하여 걸으라는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게 배운 그 걸음걸이를 나는 꽤 오랫동안 유지했었다. 그런 내게 이용환 교수님의 걸음걸이는 참 달랐음을, 그래서 더 오래도록 지각되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얼굴 표정이 매우 평화로우셨다.


강의실을 오가면서 또는 캠퍼스 곳곳에서 이용환 교수님을 만나 인사를 드리면, 교수님 곧잘 ‘아, 예’ 하시는 말로 인사를 받으셨다. 그런데 이 ‘아, 예’가 어떤 경우에는 ‘아~~! 예’로 긴 감탄사로 바뀌면서 이루어지는 때도 있다. 그러니까 호흡을 짧게 하거나 길게 하는 등 억양을 높이거나 낮게 하는 등으로 변화무쌍한 표현 방식으로 이 말을 사용하셨다. 상황에 맞게, 대화의 내용에 어울리게 적절하게 사용하신 셈이다. 학창시절에 학과 찾아오는 현직 교사들과의 대화, 대학원생들과의 대화, 학부생들과의 대화 등등 많은 만남의 모습들을 학과의 복도나 캠퍼스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는데, 그때 상봉의 시작에서 특히 이 ‘아, 예’를 많이 사용하시지 않았나 싶다. 우석이는 나중에 이 말을 그대로 흉내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아, 예’가 무책임하거나 성의 없는 응답 또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요즘 코메디에서 나오는 말처럼 ‘니 맘대로 하세요’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뭔가 분명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학창시절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면서 사회생활의 여러 상황과 인간관계의 여러 틀 속에서 나도 성장했다. 성장이라는 말 그대로 상처 입고, 물어 뜯고, 칭찬과 기대, 그리고 남을 위한 봉사, 무엇보다도 ‘농업교육’은 어떤 길로 가야하겠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과 사유들로 꽉 차게 살아왔다는 말이 될 것이다. 개인의 성장이란 말 속에는 그처럼 벅찬 회한과 기쁨과 반성과 기대가 뒤섞여 있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골수에 박힌 뻣뻣한 언행이었다. 내 마음과 생각과 느낌과 바램과 달리 외형적으로 뻣뻣해 보이고 한 호흡만 늦추어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을 직격탄으로 말을 하는 등 젊어서는 신선하고 씩씩하고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던 그 단순하면서 때묻지 않은 그런 태도들이 소위 중견교사가 되면서 어울리지 않는 태도가 되고 만다. 차라리 메모를 하여 전달하거나 하면 훨씬 충분한 뜻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그 또한 사내로서 쑥쓰러운 일이기만 하다. 그러면서 부장교사를 1년 하고 말고, 쉬었다가 또 1년 또는 6개월을 하고 말고 하는 연속이 된다.

수원농생고에서 6년을 근무하면서 부장을 환경부장, 연구부장, 교무부장, 실과부장 4개를 거쳤다. 그런데 이 4개 부장의 총 근무기간이 3년이다. 담임 역시 3년을 했다. 물론 이 중 1년은 부장교사와 담임이 겹치기도 하였다. 아무튼 6개월짜리 부장교사를 포함하여 3년 동안 4개의 부장교사를 하게 된 셈이다. 지나고 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다. 참으로 내 자신에게 충실하였고, 나 아닌 사람들의 무능과 가식을 질타하던 시절이다. 나만 겪는 홍역은 아니었겠지만 내게는 매우 부족했던 그 무엇을 지니고 살았던 게 분명하다. 그 때 왜 나는 이용환 교수님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수원농생고를 떠나 용인농생고에서 1년을 ‘76학번 박종대 선배님과 함께 근무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창시절 이용환 교수님이 쓰시던 ’아, 예‘라는 그 말 말입니다. 아주 사용하기 힘들었던 말이네요. 웬만한 상황들은 ’아, 예‘로 가야겠어요.” 그런 대화를 하였고, 실제로 두 어번 병원에 입원했던 스트레스 환자인 나는 웬만한 상황들에 ’아, 예‘로 가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몇 번 하니까 매우 평화로워지는 요체임을 알게 된다.

막상 ‘아, 예’의 깊고 오묘한 사용법을 알게 되자, 거기에 하나 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용환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자주 사용하였던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다. 교수님은 그 말을 어떤 상황마다 적절하게 사용하셨다. 그리고는 혼자 꽤 기분 좋게 웃으셨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보다 그 말을 사용하신 교수님이 훨씬 신나 하신다. 난 가끔 왜 저 말이 이 상황에서 저렇게 신나는 것이어야 하나? 하는 의아심을 가지곤 했다. 보통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은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처럼 목적만 달성하면 만사가 다 좋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면서 매가 꿩을 잡듯이 자기 전공을 제대로 사용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농산업교육과에서 공부하여 현장에서 교사를 제대로 하는 것도 ‘꿩 잡는 게 매’의 의미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학창시절에 그 말의 표면적인 의미인 목적을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방법이 어찌되었든 목적을 이루는 것이 첫째라는 의미에서 이제는 그 말을 이렇게 풀이하고 싶다. 꿩을 잡아야 매이다. 그러니 농산업교육과를 나와 현장에서 교사를 한다면 아무리 좋은 대학, 좋은 교수진, 좋은 학습을 이루었어도 그 좋은 교육으로 배출된 현장 교사가 현장에서 제대로 된 역할과 업무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꿩 잡는 게 매’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이용환 교수님은 그렇게 농산업교육과를 첫 해 입학하여 정년을 앞둔 오늘까지 그렇게 ‘꿩 잡는 게 매’의 위치에 계셨다. 훨씬 사회생활을 겪고 나서야 ‘아, 예’의 사용하면 할수록(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오묘해지는 겸손한 낮춤, 마치 교수님이 휘청거리시면서 온 몸의 긴장을 풀고 다니시는 어떤 하나의 경지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찌감치 교수님은 어떤 계기에 의해 이러한 깨달음을 지니셨을 것 같다. 어쩌면 수준과 질과 양은 다르겠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어떤 강한 스트레스의 과정이 분명 계셨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한다. 내가 그 ‘아, 예’를 실천하면서 사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살아가면서 한 길을 꾸준히 그리고 소리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면서 걸어간다는 일은 말로는 쉬워도 실제 이루어 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화에 의해서 현실을 이루고 있고, 그 사회화는 소위 말하는 연령대별 사회적 책무와 역할과 임무, 그리고 대우가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때 자칫 겸손과 양보를 놓치면 매우 어려운 상황과도 직면하게 된다. 물론 겪고 일어나면 되겠지만, 무너질 수 있는 경우도 이때가 된다.

오늘 아침 글을 읽다 보니 이런 글을 만난다. 대구 지방에서 회자되는 우스개소리에 ‘심조불산 호보연자’라는 법문이 있다. 30년 면벽 수행을 마친 스님이 먼 산을 바라보더니 구름 같이 모인 신도들에게 입을 열어 ‘심조불산 호보연자’라고 일갈했다. 신도들이 이게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를 조아리는데, 한 꼬마가 스님이 바라본 먼 산을 가리키며 ‘산불조심 자연보호’하고 외치더란다. 30년 전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구호를 써붙였던 것이다. 원효 스님은 “지혜로운 이가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 두 개의 이야기를 합치면 ‘아, 예’와 ‘꿩 잡는 게 매’와 상통하지 않는가. ‘79년에 입학하여 2009년이 되었으니 꼭 30년이다. 세상이 많이 변화되어 있다. 거꾸로 글씨를 읽지나 않을까 내 자신을 경계한다. 이용환 교수님의 정년을 앞두고 짧지만 강렬했던 일화로 혹여 교수님을 잘못 느끼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수님은 쌀로 밥을 지으신 분이지, 모래로 밥을 지은 분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이 토양이 아직은 낯설지 않다. 농업교육이 마이너리티가 되었지만 관점을 지니고 교육에 임하며 세상을 대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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