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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종류를 알 수 없는 매너리즘

by 나무에게 2013. 12. 24.

종류를 알 수 없는 매너리즘.....


그랬다. 오늘 종일 생각해 본 것, 그것은 종류를 알 수 없는 매너리즘이었다. 뭔가 야생의 사유에 어긋나는 매너리즘이다. 난 아직 나름대로 내 진행 방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곳, 꽤 많은 이들이 이미 야생을 버렸다. 야생을 피하거나 경멸하거나 무관심한 척한다. 그리고 어떤 매너리즘으로 집단을 이끌고 있다. 앞뒤가 분명한 일을 돌린다. 애둘려 돌게 한다. 그게 그동안 뭔가 이곳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의 단초였다.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 사람이 바꼈다고 한다. 그렇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을 골라하거나 피해서 너는 하라, 나는 다른 방법이 있다. 라는 식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분위기는 소위 손가락질을 받았다. 지금은 그런 사람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매너리즘이 매너리즘을 부르고, 자기들끼리 알 수 없는 동행을 한다. 서로 견제하면서 결국 자기들의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처음 내가 텃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종류를 알 수 없지만 꽤 이 사람들이 뭔가를 유세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그 본질을 우직하게 이끌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주 화가 났다. 그 화를 넘기면서 나름대로 이런 저런 사유를 했다. 오늘 내가 만난 것은 일의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내가 지닌 야생성이, 급한 성정이 나를 한 수 가르킨 것이다.

그렇다고 배워질 것 같지 않다. 난 더 거칠어질 것 같다. 다시 내 방식의 농업교육에 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더 입이 거칠어져도 되겠다. 더 지랄같은 소리를 하며 떠들어도 되겠다. 생산성이 없는 매너리즘에 매도당할 필요는 없다. 농업교육은 무실역행이고 근면과 성실이다. 흙을 만지지 않고, 입으로 하는 농업교육은 가짜다. 배우는 사람을 현장에서 설명하고 실제로 해 보게 하지 않는 농업교육은 가짜다. 최소한의 현장성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이곳 사람들은 거칠어질 것이다. 노가다는 사람을 거칠게 만든다. 거칠어진 사람의 근성에서 현장이 가꾸어진다. 욕도 하고 소리도 질러야 현장이 돌아간다. 서로 거칠어짐을 칭찬하여야 한다. 서로 안이한 생각을 보호하고 안전한 방법을 보장하며 매너리즘으로 가는 것이 현장 교육은 아니다.

농업교육은 몇 가지 상호 보완 되어야 한다. 아니다. 이도 아니다. 이제 농업교육을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아무런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뭣 때문에 농업교육인지 답을 못하겠다. 대학을 보내려고, 농사짓는 사람을 만들려고,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기르려고? 대체 뭔가? 누가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어떤 교육을 하겠다는 것인가? 농업교육을 하는 자들은 누구며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어떤 생각의 합의점을 가지고 어떤 경로를 통하여 왜 이곳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옛날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과연 합의는 필요한가? 그저 시대적 상황변화와 시대적 흐름에 잠시 무임승차했다가 또 시대를 만나면 그렇게 반복하면서 조삼모사 하면 되는 것인가? 농업교육의 근간은 없는 것인가? 있다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