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02-삶에서 유리된 성의 유희

by 나무에게 2013. 12. 23.

삶에서 유리된 성의 유희 / 온형근


전경린의 물의 정거장을 샀다. 전경린의 단행본을 사서 읽기는 처음이다. 처음 그의 글을 읽은 것은 여기 저기 문학 잡지에 실린 글들이다. 염소...로 시작되는 글이 내게 깊은 자극을 주었다. 물의 정거장은 그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전경린을 다시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왜 그는 삶에서 유리된 성의 유희를 그토록 심도 있게 따져 들어가는 것일까? 이 소설집을 읽고 내가 지닌 의문의 열쇠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부재를 담담하게 그렸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담담하지 않다. 뭔가에 매여 있고 치열하다. 사랑이다. 성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공중에 가득한 선물을 통하여 세상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것이지, 남성 또는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는다. 소설집 전편에서 남성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지만 여성 자신은 지극히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수채화도 아니고 판화도 아닌 짙은 유화이다. 전경린은 처음부터 유화를 그린 사람이다. 그에게 삶은 뭔가를 끊임없이 따라 그려내는 그림인 것이다. 어쩌면 그 자신이 유랑의 길을 받아 들이고 구도자의 시선으로 길을 나서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가야금과 거문고의 음율이 엿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의 언어에 단조로우나 깊은 음율이 엿보인다면 그의 유랑도 다른 맛이 있게 될 것이다.

내면의 깊은 사유에서 비롯되는 음습함도 산자락에서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의 건드림에서 말라졌으면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경린의 소설들은 읽는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안타까운 긴장을 안겨 준다. 책을 읽고 덮고 나면 실어증처럼 한동안 입을 다물게 된다. 먼 산과 먼 하늘이 새로운 의미가 되어 온 몸이 부르르 떨게 되는 그런 시간들이 예정되어 있다. 눈이 슬쩍 젖어 만물이 뿌옇게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