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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35-변종태 시인의 <안티를 위하여>, 작가마을

by 나무에게 2013. 12. 23.

작가마을 시인선 3으로
시인 변종태의 <안티를 위하여>가 출판되었다.
인연법에 의해 그 시집을 받아들은 그 날,
수원 화성이 보이는 <시상>에서 펼쳐 읽고,
거꾸로 막걸리집에서 술을 마셨다.
이제 그 시집을 음미한다.

1. 타전
변기 끝에 불안하게 걸린 송신기가 흔들린다.
저 불안한 진리를.
죽음의 희망이 남아 있는,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2. 개구리, 레베카 드 모네이의 봄
봄이 왔다.
6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청개구리 한 마리.
운전중인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사라진다.

3. 깡통 속의 여자
-이 여자는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여자의 물관을 타고 까마득히 올라가는 웃음을 좀 봐
속잎까지 드러내고도 살랑바람에 흔들리는
여자가 흘리는 웃음에
안개가 끼고, 이튿날 비가 내리고, 다음날은 또다시 태풍이 부는
바코드가 지워져버린
이 여자의 유통기한은 언제일까.

4. 고흐의 잃어버린 한쪽 귀
겨울에 하필이면 비가 내릴 게 뭐야. 짙은 유화 내음을을 맡은 귀가 자꾸만 노오랗게 떨고 있어.황색시대를 가로지른 바람이 옆구릴 간지르고 있어. 노오란 하늘에서 노오란 햇살이 노오랗게 쏟아지는 노오란 계절. 겨울에 하필이면 비가 내릴 게 뭐야.

5. 공기방울을 자르다
면도기에 서서히 잘려나가는 공기방울들,
수염은 남자의 무덤이다.
깎을수록 덧나는 죽음,
잘린 공기의 과육이 부드럽다.

6. 무지개, 날마다 떨어지는
아파트 외벽을 타고 넌출을 뻗으며 올라가다 말라죽는 말들,
이따금 구름이 얼비치는 쇼윈도에 부딪쳐 떨어지는 말들.
진열장 안의 마네킹이 뱉어내는 말들,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들.
저들끼리 말 꼬리잡기를 하는 엘리베이터.

7. 일요일의 나라
일요일이 내게로 걸어오신다.
내가 버린 일상의 남루, 그 터진
양말을 신고

8. 피카소와 2년생 소나무
문득 그대를 보고 싶은 내 마음 속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소나무 이파리처럼 빗살무늬 아픔을 견디다 2년생 소나무 묘목을 옮겨 심는다.

9. 구멍은 소리를 만든다
구멍을 클수록 저음으로 운다.
작은 구멍은 고음을 낸다.
사랑은 고음, 알상보다 한 옥타브 높은 소리를 낸다.
구멍 탓이다.
그대와 나의 헐거워진 구멍,
긴장 풀린 저음이 난다.
구멍을 스치는 바람이 소리를 만든다.
그 뒤로 하얀 물보라 밀려온다.

10. 보름, 어리연꽃 피다
어리연꽃이 샛노랗게 피어 있어. 노오란 달빛을 삼키던 목구멍이 아려와. 조각조각 베어 물던 달빛, 자꾸만 가슴 속이 울렁거려.

11. 얼음, 굳은 맹세
레미콘 차량에 실려온 검은 구름이 거푸집 안에 쏟아진다.
제 몸을 웅크린 사내가 거푸집 안에서 굳어간다.

12. 안티를 위하여
지구의 반대편에서 담배를 피며 걷던 흑인 남자가 나를 부르네.
그것뿐이었네.

13. 사정 혹은 아이스크림(상상력 강의.1)
끈적한 액체를 흘리고 난 뒤
축 늘어져버리는,
음흉한 기호체계

14. 여름, 개울(상상력 강의.2)
제 속살까지 환하게 드러내서
모든 걸 보여주는 개울물
제 사타구니에 허연 거품 일으키며
역류를 시도하는 물고기
새끼들에게마저 다 보여주고
음모처럼 자라는 수초에게
곁눈질하는
여름인가 봐, 그렇지?

15. 조립 로봇
손가락이 베일 듯 날선 억새 이파리에
열 다섯 처녀애 핏줄처럼 파란 한 날 지나가고
꼼짝 않고 대사를 치르는 메뚜기 한 쌍,
네 살배기 아들 녀석
아빠, 얘네 합체했네.

16. 고딕체로 서 있는 당신
오늘, 지금, 현재, 지금, 이곳, 여기, 이 자리는 늘 불편해서
자꾸만 어제라는 시간을 호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립니다.
당신이 누워 있는 페이지는 많이 낡았더군요.
떨어진 솔잎도 솔내음을 잊은 채 바싹 말라버렸더군요.

17. 소철 아래 눕다
소철은 쇠를 먹고 산단다. 소철의 깃꼴겹잎 아래 가지런히 누운 녹슨 철사들, 누군가의 몸을 단단히 구속했을 법한, 평생 쇠만 줍다가 허리가 굽어간 옆집 한씨 아저씨, 단 한 번도 남을 구속한 적이 없는 한 씨 아저씨가 시립공설묘지 소철밑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18. 백발의 부처
교미하던 방아깨비 한 쌍, 그대로 죽어 있다.
노오랗게 알을 슬어내던 지상의 슬픔,
모국어를 잊어버린 슬픈 방아깨비,
한 쌍의 마지막이 저렇게도 장엄할 수 있다니,
한라산을 향해 거푸 절을 해대던
그 날의 축원을 기억이나 하는지.

19. 꽃은, 피었다, 진다
그 꽃에 앉은 청띠제비나비가
그 꽃에 죽을 때까지 앉아 있지 않을 것처럼
그 꽃이 죽을 때까지 피어 있지 않을 것처럼
너도 나도 잠시 이 세상에 피어난 한 송이의 양달개비꽃일뿐이다.
제 주머니에 만 원권 지폐가 있다고 제 것이 아닌 것처럼

20. 구림 프로젝트(백제사연구서설.3)
나도 애벌구이한 딸 하나만 낳고 싶어. 어머니의 그 어머니들처럼 참구이를 하지 않아도 좋은, 황토 한 줌만 훔쳐오고 싶었어.

21. 은해사
은해사 입구 공중전화가 석탑처럼 서 있다. 홍조를 띈 비구니 하나 탑에 매달려 긴긴 염불을 외고 있다. 근엄한 얼굴로, 슬픈, 진지한 얼굴로 염불을 외고 있다. 합장을 풀지 않았다. 두 손에는 전화기가 들려 있다.

22. 군밤장수*
어제도 같은 시간 그 앞을 지나간 부랑자를 보면서, 이봐 밤이나 한 개 먹고 가, 인적이 뜸해진 길을 보면서, 가스 불을 최대한 줄이면서, 흑갈색 껍질 사이로 드러난 군밤의 뽀얀 속살을 보면서, 오늘밤에도 들어오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면서, 그녀와 낯선 사내의 정사 장면을 상상하면서, 문득 달아오르는 자신의 얼굴을 느끼면서, 팔리지 않은 군밤 리어카를 뒤집으면서.

23.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가을을 배경으로 이별하는 장면을 구성하고
사랑 버튼을, 그리움 버튼을, 욕망의 버튼을,
혹은 자살이나 죽음의 버튼을
혹은 무장해제 버튼을
혹은 무조건 항복 버튼을 눌러버리면 어떡하지.

24. 낚시
삶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느단 살점 하나 입에 물고
물구나무서서 무자맥질만 하다가
살점마다 빼앗기고
숨 고르러 물 위로 솟아오른다
이 불길한 입맞춤
<전문임>

25. 관음의 뜰을 산책하다
난 절대로 관음을 탐한 적이 없는데,
저 눔의 다람쥐, 저 눔의 다람쥐란 놈이
관음상을 타고 올라
봉긋한 가슴 위에서 관세음보살을 탐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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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안티를 위하여, 작가마을

시 제목과 그 제목 중에서 한글 붓글씨로 써서 감상할 수 있게끔 전략, 중략, 하략 등을 생략한채 이어서 감상하였다.
그런데 그래도 의미가 중해서 좋았다.
시집 읽은 기쁨에 이 글을 변 시인에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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