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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41-산책자의 길, 풍경과 하나 되기

by 나무에게 2013. 12. 23.

산책자의 길, 풍경과 하나 되기

- 박윤우 (서경대 교수, 문학평론가)



1. 풍경의 안과 밖
온형근 시인은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을 가졌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연작시 「화전火田」의 거친 호흡과 자연에 밀착된 야성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 그가 아프다. 아니 아팠단다. 하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나이는 못 속인다며 나와 같이 침도 맞고 한약을 지어먹었다. 그러나 그는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의 치유를 믿는다. 아니 믿을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소박하기만 하다. 그는 그저 꽃이 좋고 풀이 좋아서, 나무가 좋고 숲이 좋아서 산을 찾고 들을 다니며, 정원을 가꾸고 땅을 일구었던 것뿐이다. 그러기에 그는 오히려 한 사람의 풍류가이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를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가 그저 그렇게 유유자적한 한인閑人으로서 살기에는 너무도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만 자라는 나무를 정겹게 지켜보듯, 또는 흙을 북돋우고 거름을 주듯 묵묵히 곁에서 그들이 잘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산다.
그런 의미에서 온형근 시인은 또한 사색가이다. 그의 말들은 진중하며, 무한한 자기성실성의 깊이를 지녔다. 그 언어가 비록 막걸리 가득한 술잔에 담겨 흐를 때라도, 그는 그것을 헛되이 내붓거나 흘려버리지는 않는다. 그처럼 그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는 그의 마음 안에 담아둔 견고한 소망이자, 혹은 생채기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시집 『화전火田』을 내던 시절, 그의 시는 땀에 흥건히 젖은 몸짓을 하고 숲과 산, 들과 대지의 호흡을 생생한 울림으로 쏟아내었다. 그런데 이번 네 번째 시집 풍경의 분별에서 그 살아 숨쉬는 목소리는 낮은 음조로 잦아들고 있음을 본다. 그는 아무래도 산 속 움막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이제 그는 서늘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그가 땀 흘릴 때부터 예비하고 있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시집 풍경의 분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는 '풍경의 분별'과 '풍경의 가벼움'이라는 소제목이 보여주듯 시인 특유의 풍경 바라보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3부 '로드 킬'과 4부 '그녀의 로즈 가든'에 이르면 이 '풍경'의 개념은 보다 확장되어 생활과 여행의 모든 곳에 그 자장이 퍼져 있다. 그러나 시인은 틀을 존중하되, 그로부터 자유롭다. 시집의 시편들을 굳이 일정한 시선에 의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는 혼자 있을 때건, 사람과 부딪칠 때건 항상 자연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2. 풍경이 지닌 치유적 본질
무릇 '풍경'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에 자연을 노래한 시인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진대, 시인에게 '풍경'과 '자연'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서정시의 본질이 주체와 대상의 동일화에 있다고 할 때, 항상 시적 대상으로서 자연은 인간에게 그를 닮을 것을 요구해 왔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짐짓 자연 속에 동화되기를 바랐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말하자면 산은 산이 아니라 슬퍼 눈물짓는 산이고, 꽃은 꽃이 아니고 아름다운 미색을 뽐내는 꽃이었으며,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설레며 유혹하는 미지의 꿈이었던 것이다.

겨울 산은
그래서 기름하고 휘우듬하게 날카로워져 있다.
-「겨울 산」부분

이렇게 그에게 '풍경'이란 말은 기왕의 '자연'이 의미화 되었던 방식과 달리 철저히 대상화된 언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틈입될 여지가 없다. 우리는 다만 그 또 하나의 주체가 보여주는 만휘군상에 대해 인식하고, 반응할 따름이다. 온형근 시인의 솔직함, 또는 자연을 대하는 그만의 고유한 사고방식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풍경이란 진실로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얼핏 보기에 은근하게 불어오는 미풍과도 같이 시인의 몸과 마음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존재로 나타나 있다. 그 풍경은 때론 한껏 고즈넉하기도 하고, 때론 한껏 몸을 가벼이 하는 것이라서 "시간에서 함부로 튕겨나 / 들판의 눈부심에 동공이 좁게 모아"(「시간의 풍경」)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풍경을 '풍광風光'이라 부른다.

바람이 찾아드는 날은 풍광이 촘촘해
만져 보기 어려운 헛것이라
여전히 쑥스럽다
밭풀을 죄다 뽑고 난 후
바람이 흐르는 냇가로 나서고 있는
풍광과 만난다
- 「밭풀에게 - 풍광01」부분

빛은 떠날 채비로 마음을 동여매고
떠난 곳은
텅 비워낸 풍광으로 꽉 찬다
-「오래된 자리에게 - 풍광06」부분

내 안에 잠겨져 있는
채워져 열어낼 수 없는
선선한 풍광이 눈썹을 아스라이 긁어댔다
-「나뭇잎에게 - 풍광10」부분

이들 시편들을 함께 보다 보면 우리는 시인에게 '풍광'이란 그저 즐거운 흥취의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게 그것은 우선 살포시 부는 바람과 함께 찾아오고 움직이는 생명의 주체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빛에 의해 생성되는 자연의 살아있는 풍경이자, 존재하는 산과 들, 숲과 나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 즉 이들 자연물들이 엮어내는,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풍겨오는 이 무한한 빈 공간을 꾸며내는 일종의 아우라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것을 자신의 몸과 마음, 정신의 안쪽으로 불러들여올 수도 있으며, 또한 풍광 스스로 시인에게 감정과 인식을 불러일으켜주기도 한다. 요컨대 '풍광'이란 "나 없이도 만물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나뭇잎에게-풍광10」)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먼저 풍광을 한껏 가늠해보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풍경은 다정히 말 건넬 수 있는 살아있는 주체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온형근 시인의 풍경에 대한 사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풍경을 자신의 삶에 끌고 들어와 현실의 의미와 대조시켜봄으로써 보다 본격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목소리는 매우 복합적인 깊이를 가지고 내면화된다. 그에게 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삶의 일상적인 현실은 '상처'의 의미를 함축하는 바, 시인은 "상처에게 환히 트이고 깔끔해지는 것"(「상처의 풍경」)은 오로지 풍경밖에 없다고 말함으로써 풍경이 지닌 치유적 본질을 시적 사유의 전면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치유적 본질이란 마땅히 일상적 삶에서 시인이 겪는 갈등과 고뇌, 배리와 절망 따위를 넘어설 수 있는 힘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뜻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남과 자신을 탓하며 얽힌 실타래를 쉽게 풀지 못할 때, 시인은 풍경에게 말 건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비가 올 때 그 풍경은 "바람에 말렸던 포화된 빗물"로, 낙엽이 길가에 뒹굴 때 그 풍경은 "길 하나 아늑히 뚫려 들어가" 있는(「풍경의 가벼움」)그런 가벼움을 지닌 존재로 그에게 다가선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뜻하지 않게", "민틋하게 맴돌다 꿀꺽 삼켜"(「풍경의 가벼움」)지는 안온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시인의 내면에 자리를 잡는 그런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풍경을 대상으로서가 아닌 주체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의식, 즉 분별의 그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풍경은 내 속에서 자기를 생각한다/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만취의 풍경」)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흔히 동양적 자연관의 본질로 이야기되어 온 '물아일체'나 '정경합일'의 경지와는 다른 자리에 선 것이며, 따라서 자연적 대상을 인간적 주체의 동일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일반적인 서정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시인은 시집 뒤의 한 여행시편에서 그 풍경을 "갑자기 쏟아지는 비와 금방 그치는 환함/내 안의 풍경도 호주의 여름비를 닮아/속을 한꺼번에 쏟아 내고 거둔다."(「내 안의 풍경」)고 표현하기도 한 바, 이 상호 비교의 우선권은 마땅히 풍경에게 있다 할 것이다.
이렇게 온형근 시인의 풍경론은 '분별'의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다. 그것은 물론 삶과 의미의 시시비비를 가린다거나, 호불호를 따지는 일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우주율'이며 '어수선한 세상을 봉안하는 일'로서, 시인이 마음 쓰는 "상처를 망각하기 위한 몸의 추스름"(「풍경의 분별」)이 내맡기는 '길 나섬'이기도 하다.

그 긴 길은 시름이고 쓸쓸하여
몸을 근질이며 자주 발길질을 종종거리고
계절마다 돌 틈 사이에 핀 햇살 같아
그악스레 다시 정겨운 순간을 살아가는 당위다
-「풍경의 분별」마지막 부분

여기서 우리는 온형근 시인의 곡진한 풍경론이 다다른 몹시도 순결한 결론을 본다. 일상의 고달프고 어두운 그늘과 '풍광'의 안온하고 따사로운 기운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삶의 주체들 사이의 은밀한 대화는 안과 밖의 '분별'을 거부하는 새로운 변증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3. 여행, 혹은 풍경의 산책
이제 온형근 시인의 발길을 따라 그가 밟아본 여러 곳의 '풍광'을 살펴볼 차례다. 시집 4부에 있는 여행시편들에서 '풍광'은 다시 한 번 그 의미가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시인이 진정으로 느끼고 싶었던, 혹은 받아들이고 싶은 그 자신만의 풍광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여행하면서 보는 풍광은 곧 '풍경'을 산책하는 일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그의 발걸음은 사뭇 가볍다.
그는 한때 가본 사람이 흔치 않은 쿠바를,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생태도시의 원형이라며 답사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 그곳의 '풍광'은 보이지 않는다. 가보지 않은 내게도 아쉬운 일일지 모르나, 그는 어떤 연유에 의해서든 그곳을 다녀올 것이다. 미루어 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시집의 4부에 집중되어 있는 여행시편들에서 '여행'은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보는 데 따른 찬탄, 말하자면 즐거운 감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시인에게 즐거움이란 항시 '풍광'에 대한 느낌임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여행은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하우스로 가는 길의
차창가로 비 머금은 청량한 풍경
먼 곳은 더욱 가깝다
풍경은 명랑하다
-「블루 마운틴 국립공원」마지막 부분

온화한 나라 상록활엽수들의 눈 맛
내 눈을 건드리는 것은
뭉게구름처럼 서있는 나무
유칼립투스의 천국
-「유칼립투스의 천국」마지막 부분

경치를 읽는 시야가 맑아지며
호주의 정물이 되어 있는
기록은 나를 남겨둔다
-「즐거운 여유」마지막 부분

여기서 보듯 시인은 마치 소풍 나온 어린이 마냥 '즐거움'과 '여유'를 가지고 자연의 풍광을 만끽한다. 먼 곳이 더 가까운 자연의 청명함과 맑아진 시야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러므로 그 시야에 들어오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뭉게구름과도 같이 보이는 것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의 뒤에 시인은 스스로 '남겨짐'의 자리를 택한다. 이것은 경물의 완상이나 관조와 전혀 다른 자리에 존재하는 인식이다. 그것은 모든 욕망의 비움과도 같은 것이며, 그저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서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여행시편들은 단지 즐거운 풍광의 '산책'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이들 시편에는 바다가 있는가 하면 모래사막이 있고, 거대한 가로수 숲이 있는 바, 이 광대한 자연에서 그가 진정으로 인식한 것은 시간의 영원한 지속이며,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삶과 세상의 무의미로 연결된다.

세 시간 가까이 전개된 가로수
녹의 개념 안에 꽉 갇힌 채
볼 수 있는 것은 풍경이고
만져지는 것은 시간이다
( … 중략 … )
가로수의 사유는 지속적이어서
높낮이 구별되는 수준이 있을 뿐
미소를 주거나 따뜻한 손길을 경계한다
- 「가로수 풍경」부분

깃털처럼 가벼워진 시원의 몸짓
우주에서 덮어줄 것 없는
햇살 가득 닮아 있는 눈부신 손짓
( … 중략 … )
모래는 가벼워져 지탱하기 벅찬
세상의 아득한 무의미를
모래로 가득 시간을 채우고
순간만이 존재를 일깨워줄
넬슨 베이를 거닌다
-「넬슨 베이 근처 거닐다」부분

시인은 거대한 가로수 숲 속에 갇혀 시간을 만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리고는 가로수의 지속적 사유를 배운다. 아니 느낀다. 바다는 또 어떤가. 망망대해에서 그는 오로지 아득함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바다 이 편에는 여지없이 또 하나의 거칠 것 없는 모래벌판이 펼쳐져 있음에랴. 그것은 원초의 순간이라서 날아갈 듯 너무도 가벼운 풍광인 동시에 시인이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아득한 무의미"란 자아의 현존을 새삼 파악할 수 있는 의외의 소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여행은 일종의 '길 나섬'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길이란 그저 열려 있는 것이며, "약속된 항로가 이끄는 대로 행복하여/상세하게 즐거워하라"(「돌핀 크루즈」)고 말 건네는 그런 것이다. 그 말에 화답하는 일이야말로 "풍경이 씹히고 씹혀진 풍경은 생즙을 내고, 다시 멀쩡한 풍경이 되어 내뱉는"「풍경의 생즙」소통의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온형근 시인에게 자연은 다시 한번 완성의 대상이 아닌 대화의 주체요, 생명과 삶의 현실이 된다.

4. 일상으로부터의 비켜서기
시집의 마지막이 아닌 3부에 시인은 다른 시들과는 조금은 색다른 시편들을 수록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생활과 일상에 섬세한 관심을 보이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시에 관한 한 좀처럼 자신의 일에 대해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산과 숲과 자연을 말할 때는 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주변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이들 시편이다. 역시 그의 시들을 읽는 나로서는 왜 썼을까를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삶의 일상은 대체로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딪침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와, 어긋남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으로 점철되어 나타난다. 누구에게나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삶의 이상이 있게 마련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진 채 쉽게 언어의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상의 관습적 자아와 그의 관습적 행위만을 담담하게 반복하여 제시할 뿐이다.
소위 '생활시'라 할 수 있는 이들 시편에는 '바람', '잠', '숙취'의 이미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들 이미지가 보여주는 그의 생활은 피로한 일상의 단면들이다. 그는 "폭삭 삭아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어제」) 어제를 이야기하면서, 또 '비린내 나는 콩나물국'(「콩나물국」) 을 뜨면서 오늘의 일탈을 꿈꾼다. 숙취에 비몽사몽 하는 자신의 모습을 "습관의 여정"(「숙취」)으로 치부하면서도, 맨 정신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필연을 "사방이 검은 눈만 멀뚱거리며 눈뜨고 있다"(「맨 잠」)는 타자의 시선으로 대신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은근히 일탈의 모습 저편으로 비판적 자기 관조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목로 구석 쭈그려 긴 시간을 보낸 것"(「해갈을 위하여」)이 '해갈을 위한' 것이며, '숨쉬고 싶은 욕망'인 동시에, '새벽을 여는 창문과도 같은 것'임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어긋나는 일상에 대한 반감은 결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욕망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습은 묘한 일상이 연속된다
다시 잠을 청하는 바람 센 날의 풍경처럼
굵은 가지 내던지며 몸 털어 내는 나무처럼
흔들리는 가지와 얼굴이 싸하게 따끔한 것을
양끝 뭉툭하게 위신 없이 쏟아져 나오는
빈곤한 상상력을 돋워주는 날개를 달았다
부어 있는 손바닥 모두에게 미안하다
-「바람 센 날의 풍경」마지막 부분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일상을 휘감고 있는 관습적 삶과 행동의 굴레를 오히려 '미안함'의 태도로 객관화하고 위무함으로써, 다시금 그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만의 인식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일상으로부터의 비껴서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먼 길을 에둘러 한참을 걷는 것으로 즐겁다"(「혼자되는 날」)는 대목에 이르면 그의 생활시에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 삶의 부정과 일탈의 그늘 따위는 드리워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생활에 대한 자성적 사유는 계속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온형근 시인의 생활에 대한 단상이 견고한 자신의 사색 공간을 위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시편들에서 자신이 원하는 생활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를 개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미 시집 《화전火田》에서 보여준 바 있는 것과 같은 흙과 함께 하는 삶의 소회들이다.
하지만 《화전火田》의 시편들이 땀 흘리는 노동과 자연 속의 삶 그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이라면, 「솎음거리」, 「레이크질」, 「내 안의 풀밭」등의 시가 보여주는 흙과 땅의 삶은 생활현실과의 긴밀한 상관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알레고리적 사고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여기서 비로소 자신이 부딪치고 엮어나가는 생활에 대한 자기 나름의 '분별'을 시도한다. 마치 '풍경'을 분별하듯이. "솎고 또 솎아야하는 이 얼갈이배추의 홍수"(「솎음거리」)속에서 '치받고 들이받아 흙죽이 된'(「레이크질」) 담든 몸으로 하루를 지내고 자리에 눕는 고통을 감내한다.
그 와중에 시인은 자신의 내부에서조차 풀을 뽑고 솎아내는 것과 같은 일을 지속한다. 풀을 매는지 풀이 자신을 매고 있는지 모를 (「내 안의 풀밭」) 정도의 혼돈을 끌어안고 그는 '지금, 여기'의 풀밭을 매는 일상인으로서의 존재의식을 놓지 않는다.
이쯤 와서야 비로소 온형근 시인의 '생활시'는 그가 담아두고 있는 속내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시간의식을 동반한 것이어서, 그의 사유가 비록 내면적인 풍경의 성에 칩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진정성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까맣게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증발되어 사건 사고가 되는 때 낀 우울을
금방 했던 조금 전의 일처럼 새침해진다
새벽 거친 질감의 풍경 속에
안달하는 기억들이 스멀거려
- 「세탁기」부분

시인은 세탁을 한다. 하필 "새벽 거친 질감의 풍경 속에" 세탁을 한다. '증발된' 기억 저편의 날, 그 삶의 과거는 "까맣게 그을린 기억들"이건, "하얗게 벗겨진 기억들"이건 상관없다. 그에게 세제는 기억을 새롭게 증발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도우미이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날아다니는 '새로운 증발체', 즉 스스로 생활의 역사가 자리 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온형근 시인이 말하는 생활이란 곧 '삶의 질'을 담보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환경'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답게 꾸며놓거나 비싸게 치장해놓는 물질적인 풍요도 아니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담준론과 호사의 성을 쌓고 은일하는 풍류객의 정신적 사치도 아니다.
그는 다만 뿌리고 돋구어주면 하늘과 바람, 눈과 비를 벗 삼아 스스로 의연하게 뿌리내리며 무성한 가지와 잎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는 나무와도 같이, 살며 부딪치는 생활의 하루하루가 온전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풍경을 바라보고, 분별하듯이.

5. 풍경의 언어
이제 온형근 시인의 시집을 덮고 그만의 고유한 '자연송'을 다시금 음미해본다. 그에게 자연의 풍경은 무한한 생명이라는 수사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 매우 넓고도 깊은 것이었다. 아니 차라리 그 어떤 언어로 규정하기 이전에 삶의 동반자요 조력자이기도 한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풍경을 시집에 담을 때 시인은 현실의 고뇌를 있는 그대로 함께 그리고자 했다. 그의 시편들은 생생하고도 진솔한 사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많은 것을 함축한 풍경의 언어로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언어들에 시인은 결코 아무런 사심이 없다.
시인은 즐겨 노래하지 않으며, 대신 조용히 바라보고 발견하며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둔다. 그렇게 시인의 자연송은 삶의 '길 나섬'이 되어 고유한 내면 풍경으로 승화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해탈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언어에는 언제나 삶의 지난한 과제들이 눅진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 숙제를 부인하지 않는 그 곳에, 그 안에 서늘하게 부는 바람의 풍경이 있다.

허공에 매달려 중력 없이 떠돌 말들을
떠도는 시간들 속에 꽁꽁 묶어 둔다
살고 있다 생각한 순간
가슴 시린 것들 진흙투성이
숨겨지기도 하고
숨겨진 것을 집어내려 애쓴다
뜬금없이 바람이 차다는 생각으로
길을 놓치고 만다

그 길은
한데 엉기고 뭉쳐서 튀어나오지 못하고
성기고 어눌해서 거칠게 짓눌린 채
후련하게 파헤쳐지지 않는다
춥다고 몸을 움츠리다
성분조차 분석할 수 없는
길을 놓치고 나서야 기특하게 나선다
-「길을 놓치다」부분

여기서 우리는 풍경을 분별하고자 하는 시인이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가슴 한 구석에서 풀어놓은 삶의 진솔한 토로와, 존재의 허허로움에 고뇌하면서 스스로에게 자유롭고자 하는 그 견고한 시적 인식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언어가 무척이나 풍경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온형근 시인은 시가 자신에게 거짓됨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그의 시는 곡진하게 이 시대의 자연적 삶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최소한 노래하는 서정시로서의 자연송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삶의 질을 문제 삼는 요즈음 환경문학이니 생태문학이니 하는 논의가 시단의 중심 화두로 대두되고 있지만, 우리는 시집 『풍경의 분별』을 읽고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시를 쓰는 주체의 인식임을 다시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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