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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39-일상으로부터의 비켜서기

by 나무에게 2013. 12. 23.
일상으로부터의 비켜서기


시인에게 삶의 일상은 대체로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딪침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와, 어긋남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으로 점철되어 나타난다. 누구에게나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삶의 이상이 있게 마련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진 채 쉽게 언어의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상의 관습적 자아와 그의 관습적 행위만을 담담하게 반복하여 제시할 뿐이다.


그는 은근히 일탈의 모습 저편으로 비판적 자기관조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목로 구석 쭈그려 긴 시간을 보낸 것”(「해갈을 위하여」)이 ‘해갈을 위한’ 것이며, ‘숨쉬고 싶은 욕망’인 동시에, ‘새벽을 여는 창문과도 같은 것’임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어긋나는 일상에 대한 반감은 결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욕망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습은 묘한 일상이 연속하여
다시 잠을 청하는 바람 센 날의 풍경처럼
굵은 가지 내던지며 몸 털어 내는 나무처럼
흔들리는 가지와 얼굴이 싸하게 따끔한 것을
양끝 뭉툭하게 위신 없이 쏟아져 나오는
빈곤한 상상력을 돋워주는 날개를 달았다
부어 있는 손바닥 모두에게 미안하다 (「바람 센 날의 풍경」)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일상을 휘감고 있는 관습적 삶과 행동의 굴레를 오히려 ‘미안함’의 태도로 객관화하고 위무함으로써, 다시금 그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만의 인식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일상으로부터의 비껴서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먼 길을 에둘러 한참을 걷는 것으로 즐겁다”(「혼자되는 날」)는 대목에 이르면 그의 생활시에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 삶의 부정과 일탈의 그늘 따위는 드리워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자신의 내부에서조차 풀을 뽑고 솎아내는 것과 같은 일을 지속한다. 풀을 매는지 풀이 자신을 매고 있는지 모를(「내 안의 풀밭」) 정도의 혼돈을 끌어안고 그는 ‘지금, 여기’의 풀밭을 매는 일상인으로서의 존재의식을 놓지 않는다.
이쯤 와서야 비로소 온형근 시인의 ‘생활시’는 그가 담아두고 있는 속내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시간의식을 동반한 것이어서, 그의 사유가 비록 내면적인 풍경의 성에 칩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진정성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까맣게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증발되어 사건 사고가 되는 때 낀 우울을
금방 했던 조금 전의 일처럼 새침해진다
새벽 거친 질감의 풍경 속에
안달하는 기억들이 스멀거려 (「세탁기」)

시인은 세탁을 한다. 하필 “새벽 거친 질감의 풍경 속에” 세탁을 한다. ‘증발된’ 기억 저편의 날, 그 삶의 과거는 “까맣게 그을린 기억들”이건, “하얗게 벗겨진 기억들”이건 상관없다. 그에게 세제는 기억을 새롭게 증발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도우미이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날아다니는 ‘새로운 증발체’, 즉 스스로 생활의 역사가 자리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온형근 시인이 말하는 생활이란 곧 ‘삶의 질’을 담보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환경’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답게 꾸며놓거나 비싸게 치장해놓는 물질적인 풍요도 아니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담준론과 호사의 성을 쌓고 은일하는 풍류객의 정신적 사치도 아니다. 그는 다만 뿌리고 돋구어주면 하늘과 바람, 눈과 비를 벗삼아 스스로 의연하게 뿌리내리며 무성한 가지와 잎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는 나무와도 같이, 살며 부딪치는 생활의 하루하루가 온전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풍경을 바라보고, 분별하듯이.


박윤우(서경대 교수, 문학평론가), 시집 <풍경의 분별> 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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