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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38-여행, 혹은 풍경의 산책

by 나무에게 2013. 12. 23.

여행, 혹은 풍경의 산책



먼 곳이 더 가까운 자연의 청명함과 맑아진 시야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러므로 그 시야에 들어오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뭉게구름과도 같이 보이는 것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의 뒤에 시인은 스스로 ‘남겨짐’의 자리를 택한다. 이것은 경물의 완상이나 관조와 전혀 다른 자리에 존재하는 인식이다. 그것은 모든 욕망의 비움과도 같은 것이며, 그저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서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여행시편들은 단지 즐거운 풍광의 ‘산책’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이들 시편에는 바다가 있는가 하면 모래사막이 있고, 거대한 가로수 숲이 있는 바, 이 광대한 자연에서 그가 진정으로 인식한 것은 시간의 영원한 지속이며,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삶과 세상의 무의미로 연결된다.

세 시간 가까이 전개된 가로수
녹의 개념 안에 꽉 갇힌 채
볼 수 있는 것은 풍경이고
만져지는 것은 시간이다
( … 중략 … )
가로수의 사유는 지속적이어서
높낮이 구별되는 수준이 있을 뿐
미소를 주거나 따뜻한 손길을 경계한다 (「가로수 풍경」)

더 이상 살아남아 있는 것을 거부하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시원의 몸짓
우주에서 덮어줄 것 없는
햇살 가득 닮아 있는 눈부신 손짓
( … 중략 … )
모래는 가벼워져 지탱하기 벅찬
세상의 아득한 무의미를
모래로 가득 시간을 채우고
순간만이 존재를 일깨워줄
넬슨 베이를 거닌다 (「넬슨 베이 근처 거닐다」)

시인은 거대한 가로수 숲 속에 갇혀 시간을 만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리고는 가로수의 지속적 사유를 배운다. 아니 느낀다. 바다는 또 어떤가. 망망대해에서 그는 오로지 아득함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바다 이 편에는 여지없이 또 하나의 거칠 것 없는 모래벌판이 펼쳐져 있음에랴. 그것은 원초의 순간이라서 날아갈 듯 너무도 가벼운 풍광인 동시에 시인이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아득한 무의미”란 자아의 현존을 새삼 파악할 수 있는 의외의 소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여행은 일종의 ‘길 나섬’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길이란 그저 열려 있는 것이며, “약속된 항로가 이끄는 대로 행복하여/상세하게 즐거워하라”(「돌핀 크루즈」)고 말 건네는 그런 것이다. 그 말에 화답하는 일이야말로 “풍경을 씹어 생즙을 내고, 다시 멀쩡한 풍경이 되어 내뱉는”(「풍경의 생즙」) 소통의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온형근 시인에게 자연은 다시 한번 완성의 대상이 아닌 대화의 주체요, 생명과 삶의 현실이 된다.


박윤우(서경대 교수, 문학평론가), 시집 <풍경의 분별>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