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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42-오십대, 그 여자의 인생

by 나무에게 2013. 12. 23.

오십대, 그 여자의 인생



그 여자는 젊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십대에는 연식정구 선수를 했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선수생활은 했으나 꼭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라켓을 잡았다가 중고등학생 시절을 정구 코트에서 보내고 만 것이었다.

대학 갈 일이 막막했다. 연식정구가 신식 테니스에 밀려 시들해질 무렵이었고, 그 여자 자신도 그것에 목을 맬 만큼 재미를 붙이진 못했으니 대학 진학을 해야 할 텐데, 희망대로 가기엔 공부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 공부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진실로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그것을 여전히 잘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이래저래 꾸물대다가 고향에 있는 대학의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시를 쓰고 학술발표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하고, 그런대로 과에선 남에 비해 모자라지 않는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날이면 날마다 사실은 두통에 시달렸다. 쓰고 싶은 것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는 수시로 솟구쳤지만, 쓰고 보면 그 시에 담긴 이미지는 자신이 애초 생각했던 이미지들과 다르거나 모자라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여자가 시 쓰는 일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눈치 챌 때쯤 나타난 그 남자는 문학청년이었는데, 그 여자와 달리 일찍부터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쓰는 일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이미지들을 자기 자신보다 그 남자가 더욱 정확히 표현해내는 것에 처음엔 당황했고, 그 다음엔 절망했고, 마지막으론 저 남자야말로 나의 분신이구나, 아전인수로 생각했다.
그 여잔 시를 버리고 연애에 돌입했다. 생전 처음으로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시작한 사랑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마침내 찾았고 느꼈으며, 그 사랑에 자신의 남은 인생 모두를 걸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했다. 그 여자는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별로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 남자와 고속으로 결혼했고 줄줄이 아이를 낳았다.
가난해서 고통스러웠으나 그 남자를 위해 그 여자는 기꺼이 헌신했다. 아이들은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더욱 더 충만 되게 해주었다. 그 남자는 때로 가난 때문에 술에 취해 울었지만 그 여자는 울지 않았다. 그 여자는 세계의 전부라 할 만한 그 남자와 세 아이에 대해 계속 헌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 남자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남자는 작가로서 유명해졌고, 가난을 극복할 만큼 돈이 들어 왔고, 그래서 그 여자는 희희낙락 더 큰집으로 이사했고, 녹슨 장롱과 손바닥만한 텔레비전과 남루한 양은그릇들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 여자는 잠시 행복했고 충만해졌다. 그 남자는 더욱더 바빠져서 집에 와 있을 땐 오직 썼고, 쓰지 않으면 밖으로 나갔다. 연락도 없이 며칠씩 안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 여자는 때로 속이 상했지만 유명 작가의 아내로서 행여 품위를 잃을까 노심초사, 자기 자신을 잘 추스르고 견뎠다. 그 대신 그 여자에게 만성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어느 땐 두통이 너무 심해 부엌일을 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 남자와 아이들 셋은 쌀통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몰랐다. 그 여자가 지금껏 모든 집안일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고 한사코 혼자 해온 결과였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지요." 내과 의사는 권했다. 그 여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 두통이 심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정신과 의사는 그 여자에게 수십 문항의 질문이 인쇄된 설문지를 먼저 주었다.
그 여자는 집에 들어와 연필을 찾아들고 그 설문지를 들여다보았다. 부부관계는 한 달에 몇 번 하십니까. 최근 부부싸움은 언제 하셨습니까. 부부관계 뒤엔 행복하십니까. 그 여자는 그 문항들을 읽다가 설문지를 찢어버렸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두통이 그런 것들과 별 관계가 없다는 것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끔 속을 썩였지만 큰 탈 없이 컸고 그 남자 역시 전보다 바쁘게 살았지만 다른 데에서 애를 낳아 데리고 들어오거나 하는 큰 불상사 없이 지냈다. 겉으로 보아선 가난하던 시절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 참이었다. 그 여자는 두통을 참고 참으면서 에어로빅도 하러 다녔고, 서예도 배우러 다녔고,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회도 열심히 나갔고, 그 남자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찻상, 술상도 계속 차려냈다.

그러나 증상은 계속 이어졌다. 그 여자는 날이 갈수록 자기의 어떤 중심이 비어 있다고 느꼈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자주 세상천지에 자기 자신만 버려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너무나 고독했고, 그래서 또한 자주 울었다. 아이들 밥을 하다가도 눈물이 나왔고, 그 남자 서재를 치우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에어로빅은 즐거웠지만 금방 지루해졌고, 서예는 재미가 없었다.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날이 많았는데 아이들과 그 남자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하루만 집을 비워도 집 안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 여자는 두통 때문에 때로 비명을 지르면서, 화분에 물을 주었고 아이들 밥을 했고 그 남자 속옷을 빨았다. 예전엔 힘이 들지언정 즐거운 일이었는데, 힘만 들고 이젠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떤 날, 공연을 보러 갔다.
판소리와 살풀이춤과 진주씻김굿 등의 백미 한 대목씩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장인들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진도씻김굿을 볼 때 그 여자는 전율했다. 판소리를 들을 땐 울었고 살풀이춤을 볼 땐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 여자는 일단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들 셋이 다 대학을 들어간 후의 일이었다. 그 여자는 판소리를 배우면서 한편으로 장구, 북, 꽹과리 치는 법도 배웠다. 진도북춤을 일 년 이상 그 분야 최고의 달인에게 사사받은 적도 있었다. 집을 하루만 비워도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그 여자가 여름 풍물학교나 동계 판소리연수에 가느라 열흘씩 보름씩 집을 비우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 여자는 비로소 행복해졌다.

다행히 그 남자와 아이들은 그 여자의 지향을 전반적으로 지지했다. 여름 풍물학게에 가 있는 산골로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면회를 오는 일도 있었다. 곰국을 끓이고 새 반찬을 해서 냉장고에 잔뜩 넣어주고 왔지만, 까칠한 얼굴로 그 남자가 면회올 때, 행여 자신이 누구의 아내로서, 누구의 어머니로서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책을 하기도 했으나, 장구를 메고 나는 듯이 돌면서 장구채 높이 들었다가 내려칠 때, 그 여자는 충만감으로 자지러질 것 같았다. 그 여자는 그래서 최대한으로 시간을 쪼개 썼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노릇을 잘 못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하지 않으면 줄을 것 같은 것'을 하기 위해 때론 뛰기도 하고 때론 잠을 포기하기도 했다. 장구라면 웬만한 아마추어들은 능히 가르칠 정도로 실력을 쌓았을 때 그 여자는 이미 쉰을 넘고 있었다.

그때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됐다. 육체의 유연성과 역동성은 나이를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 여자는 그 여자 또래의 어떤 여자보다 잘할 수 있었으나 서른 살이나 스물몇 살의 재능 있는 젊은 사람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가령 진도북춤을 배울 때, 진도북춤의 달인이라 널리 알려진 스승에게 사사 받는 일군의 제자들은 모두 젊었고, 대학에서 무용이나 기타 그것과 관련 깊은 것 전공했으며, 이미 사회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재원들이었다.
그 여자는 그들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스승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그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 그 여자는 쉰 살이 넘은 중년 여자로서, 배워봤자 취미 생활이 될 뿐이라는 식으로 스승이 생각하는 눈치를 보일 때, 그 여자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 여자는 이번엔 바로 그런 상처들 때문에 때로 그 남자를 재운 뒤 주방에서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울었다. 너무도 늦게, 그 여자 자신의 중심을 만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그 남자까지 남의 속도 모르고 대충하라고, 그냥 취미로 하면 되지 그 나이에 당신이 인간문화재 되겠니, 라고 냉정히 말할 때, 그 여자는 정말 뜨겁게 뜨겁게 울었다.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면 더욱더 '죽을 것 같아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참된 의미에서, 그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불러도 좋은 정통예인의 길, 이를테면 풍물, 전통무용, 판소리 따위를 만나기 전까지 시십몇 년 동안의 삶은, '우연'에 의존한 셈이었다. 좀더 일찍 자기 길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 여자는 쉰이 넘어 앙갚음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의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 고유명사로서의 그리운 길을 너무도 늦게 찾은 그 앙갚음.

아내는 판소리 대학에 들어갔다.
정식으로 대학 과정 판소리 학교로 가라고 먼저 권한 것은 나였다. 아내는 때로 나를 재워놓고 공부를 하고, 때로 학교 공강 시간에 들어와 밥을 해놓고 나간다. 욕망과 현실 사이를 어느 정도 조율했는지 요즘엔 수돗물 틀어놓고 우는 일도 없는 눈치다. 늦고, 빠르고, 그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고 오로지 '우연'에 의존해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데 비하면 아내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더 비싼 옷, 더 큰 자동차를 사지 않아도 쓸쓸하지 않고 화려한 실내장식의 레스토랑에 가서 온갖 수다를 떨지 않아도 고독하지 않으며, 속으론 세속적 경쟁의식에 매여 있으면서 겉으론 이 모임 저 모임, 명분 쫓아 분주하게 사교계를 왕래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을 인생을 아내는 찾았기 때문이다. '겨우' 쉰여섯에, 나아갈 그리운 길 찾아서 제 몫 나아가고자 애쓰고 있으니, 어찌 아내를 불행한 중년 여자라고 할 것인가.
아내의 중심은 요즘 꽉 차 있다.
좋은 남자 다시 만나면 열 명의 아이라도 낳을 것처럼 생산적 창조력이 넘쳐 보인다. 옳거니, 잘못하면 이제부터 내가 쓸쓸해질 차례이다. 어쩌면 앞으론 곰국조차 끓여놓지 않고 그리운 제 길 찾아가버릴는지도 모르니까.

박범신 산문집, "남자들, 쓸쓸하다", '오십대, 그 여자의 인생', 도서출판 푸른숲,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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