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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44-유용주, 중견中犬

by 나무에게 2013. 12. 23.

중견(中犬) (시, 유용주)



집안 내력은 들먹일 필요도 없지만
성질 또한 괴팍해서

고혈압, 고지혈증에다 신경성 위장장애를 거쳐 식도궤양
까지
각종 성인병을 쓰러진 술병처럼 달고 다니면서

독한 약은 우선 견뎌내기도 힘들고
식구들 폐 끼치기 싫어 담배와 술 먼저 줄이고
새벽에는 운동장 돌고 저녁에는 수영
주말에는 산에 올라 비지땀 흘리면서 안간힘을 쓰는데

몸과 마음 시퍼렇게 독이 올라 문학 공부를 시작한 뒤로
멀리서 바라보며 존경했던 김현, 김남주, 고정희 선생님 흙
이 되어 돌아가시고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났던 기형도, 이연
주, 진이정도 물이 되어 흘러가 버리고 김소진도 가고 중호
형도 가고 김강태, 임영조 선생님 가시고 가까이 모시며 숨
소리까지 배우려 했던 명천 선생께서도 관촌 마을 소나무뿌
리로 돌아가시고 작은형, 큰형수, 매형, 어머니, 아버지를 비
롯해 내 앞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세상 저버린 사람들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가소롭구나
현미밥이 어떻고 버섯과 청국장이 저쩌구 채소 위주의 식
단에다 생감자는 갈고 마늘은 굽고 양파 즙까지 알뜰하게
챙겨먹는,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복부 비만의
저, 늙은 개 한 마리


>> 유용주 시집, 은근 살짝, 시와시학사, 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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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상사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고칠 수 없어', '이제 너무 늦었어' 등의 이유가 전제된다. 나이 많은 상사가 혹여 술자리 등에서 수더분하게 나 어린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며, '그럴까?, 그래?'하며 흔들린다면, 다시 말해 귀가 엷다면 그래도 나 어린 사람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어린 사람이 윗사람을 포기하는 경우는 대개 그 사람이 꽤나 고집이 있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진저리 칠 정도로 자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한 약은 우선 견뎌내기도 힘들'어로 시작하는 자기 성찰은 다르다. 나이가 먹어도 나 어린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기본 역량을 지닌 것이다. 시인은 어쩌면 보다 쉽게 나이, 즉 세월에 동화되고 묻혀질 수 있는 기초체력을 든든히 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식구들 폐 끼치기 싫어 담배와 술 먼저 줄이'는 사람들 역시 자연에 동화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전매권이 아닐까 싶다. 그 결과나 성과물에 연연해서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한 시도 자체에 굵은 동그라미를 몇 개 그려주자는 말이다.

살면서 흐트러지고 옭아 매고 하다가 흙으로 물로 돌아가고 마는 게 삶이다. 내 아들은 상가집에 가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돌아가셨다라고 하는거야.'
'그럼 안돼, 돌아가셨어도 다시 와야지.'한다.

'세상 저버린 사람들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그래서 '가소롭구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남은 사람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불한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뜨거운 반성이 요구되는 나날이다. 매일, 순간마다 늙은 개가 되고 있는지를 바라볼 일이다(2006.8.12.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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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온형근 시집, 풍경의 분별, 우리글, 2006.3.)


더 가난해져야 하나 중국이 있어 먹을 수 있는 것 허
드레라 하는데 중국산이면 손사레를 치며 벌레 쳐다보듯
돌아서고 굶주리는 빈곤은 신빈곤층 부유층은 불한당不
汗黨이 되어 늘고 식당에서 흔한 밥 한 끼를 먹으면서 상
에 차려진 갖가지 반찬과 국과 음식들에게 얼마나 힘들
었냐 인사한다 너희조차 물 건너오지 않으면(굶어죽지
않으려 도시 곳곳 빈 자투리에 채소와 곡물을 재배한 쿠
바는 배부르지 않더라도 굶는 일 없이 최소의 열량을 지
닐 수 있었다) 굶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도 흙 만지는 일
은 하지 않아야 할 최후수단일까 여전히 농사짓지 마라
할까 삼백만 명 가까운 빈곤의 늪에 중국은 늘 저렴한
식량을 공급해 주는 나라일까 하늘이 있어 흙을 통한 삶
도 있지 어머처럼 늘 중심에 서서 흙을 매만지며 완성되
고 겸허해지는 것을 땀 흘리지 않는 불한당만 늘어나는
시국을 응접하는 방법은 까닭도 없이 길을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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