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045-전경린, 붉은 리본

by 나무에게 2013. 12. 23.

누워서는 보이더니 바로 앉으면 보이지 않는 까만 씨앗


오랜만에 전경린을 대한다. 염소......로 만났을 때만해도 그는 내게 신선함의 전부였다. 산문집, 붉은 리본은 더운 여름을 식혀달라는 생각으로 집어 든 책이다. 그러나 시덥지 않았다. 덥고 짜증난다. 그러다 의자를 바짝 당겨 주는 글을 만난다. 그뿐이다. 또 시들해지고 당겨지고 했다. 그의 산문은 어딘가에 글을 주기 위해 쓰여진 부분도 꽤 있는 듯 했다. 밝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성찰이 깊은 글들이 곳곳에 있다. 산문은 그런 맛이 있다. 슬슬 거닐다가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맛, 그게 있다.

1.
나는 자신의 삶에서 운명성을 발견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고 생각한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어떤 종류의 인간든 간에 일관성 있게 운명을 꿰뚫은 사람은 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길에 들어선 것을 아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 무엇을 이루었거나 아루지 못했거나, 몇 걸음을 나아갔거나 굳이 셀 필요가 없는 일이다. 갈 만큼 가는 것뿐.
<붉은 리본, '주부와 애국가'>

2.
씨앗 같은 자아를 품은 채 맹목적인 생명의 법칙으로 송두리째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화두는 삶이다. 저마다 자기의 방법으로 사는 새로운 생애를 구축하면서 삶이라는 화두에 주석을 다는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삶은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다.

삶에는, 한 발 물러서서 보면 목적지가 빤한데도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 미망에 빠지고 마는 이상한 트릭이 있다.
<붉은 리본, '서랍속의 꽃들'>

3.
맑은 날 환한 꽃밭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지그시 내리는 빛 속에서 가만가만 흔들리는 원색의 작은 꽃들 하나하나에 신성이 느껴진다. 누군가로부터 그처럼 한결같이 사랑을 받는다면 그 존재가 어떻게 신성해지지 않겠는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자기애와 다른 것은 우회를 통한 놀라운 증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사랑이 내 속에 있으면 그냥 검고 작고 단단한 씨앗이지만 너에게로 갈 때, 활짝 꽃 피어 빛과 향기를 품고 하나의 선명한 감각으로 당도하는 것이다. 너의 사랑도 그처럼 나에게로 올 때 우주의 흙을 통과하여 신성으로 당도한다. 그래서 타자라는 우회의 차원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면 외롭고 또 외로워져서 그만 무구한 자연이 되어버려야 하겠지.
<붉은 리본, '외로움은 현대의 시민의식'>

4.
우리는 다시 걸어서 파이낸스 센터 지하의 맥주집으로 가 다리를 쭉 뻗고 생맥주를 마셨다. 늘 그랬지만 내 자유소풍은 충만했고 검소했다. 생에는 어떤 비밀이 있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위가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일정 수준 아래에 있지도 않지만 결코 위에 있지도 않다. 생의 향유를 위해 특별히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건 아니다. 자족적 생활과 미적 관심과 일상적 기술의 문제이다.
<붉은 리본, '일상의 기술'>

'::나무와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7-도종환, 산경  (0) 2013.12.23
046-문태준, 뻘 같은 그리움  (0) 2013.12.23
044-유용주, 중견中犬  (0) 2013.12.23
043-다이어트 보고서  (0) 2013.12.23
042-오십대, 그 여자의 인생  (0) 201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