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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47-도종환, 산경

by 나무에게 2013. 12. 23.

산경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 없이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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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산만 바라본다. 바람이 솟아나려 한다. 스치고 지나가며 울렁거린다. 어지러움 끝에 다가 서 있다. 뛰어 내리려고 했다. 종일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다. 숨이 헐떡거린다. 제자를 불러 냈다. 혼자 마시지 말고 자기를 불러 달라고 한다. 그러마 한다. 그도 내가 옆에 있는 게 싫지만은 않은가 보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라는 철리 속에 세월을 녹이고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오늘도, 내일도 모두 세월 속에 흐르는 것인데, 오늘 하루가 모여 또 하루의 삶을 엮어 내는 것이 분명한데. 제자의 얼굴에 내 얼굴이 겹친다. 그도 나도 세월을 함께 살고 있다. 저절로 살아지고 살아내고 살며 살가워지고 있다.
2006.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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