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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49-손세실리아, 늙은 호박

by 나무에게 2013. 12. 23.

늙은 호박 /손세실리아


나이 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벽에 똥칠하기 전에 어서 가야 한다고
말끝 흐리시는 친정어머니
열세 평 영구 임대아파트
칠 갈라터진 옥색 문갑 위에
경비실 황영감이 따다 준
늙은, 호박 한 덩이 펑퍼짐히 앉아 있다
순금 같은 풍채 놀랍도록 당당하다

참, 눈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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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혼자 살 수 있게 하고 꿈을 여물게도 한다. 나이는 때로 관대해진다. 주변의 사소함들에게 옷을 잽힌다. 잽혀 주는 게다. 그런데도 당당하다. 잽히는 게 아니라 유혹하는 것이다. 눈치가 있어야 한다. 혼자 산다는 것은 꿈이다. 꿈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형태다. 그러나 혼자 산다고 해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혼자됨 속에서 또 다시 함께됨을 잉태시키는 것이다. 그게 혼자됨이다. 영구 임대아파트를 찾아 나서는 일보다 더 행복한 일은 늙은 호박 한 덩이 문갑 위에 올려다 갔다 주는 영감이다. 그러니 영구 임대영감을 두 서넛 평 찾아 나서는 일이 시급하다. 아무짝에나 쓸모 없다는 말은 또 다른 세계에 들 수 있는 역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006. 9. 28> 온형근
손세실리아, 기차를 놓치다,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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