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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51-서영처, 낡은 책을 읽다

by 나무에게 2013. 12. 23.

낡은 책을 읽다 / 서영처


아버지는 책과 노트를 마당귀로 끌어냈다 시루떡처럼 쌓였던 책들이 떡고물 먼지를 흘렸다 책무더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불길 속에서 활자들 타작마당의 콩처럼 튕겨나왔다 똘스또이와 끼에르케골, 루터와 칼빈이 탔다 개기일식인양 불의 혀에 둘러싸여 웅크린 형체 書架는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아버지는 재를 흩어버리는 거다 그리곤 이름난 왕릉이나 산을 찾아 만 권의 생애를 감상하러 다니신다

번민도 회의도 타버리고 빈 책장만 남은 방, 바랜 노트 몇 권 남겨져 있다 저 갈피 속 붉은 밑줄 여전히 출렁거릴텐데 땡볕 아래 초라한 가묘를 손질하고 돌아와 아버지 단잠 드셨다 검버섯 자욱한 얼굴, 입을 열어 드렁드렁 잠언을 낭송하고 계시다 선풍기 바람에 펼쳐진 낡은 아버지를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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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까고 있다. 콩을 깐다. 콩깍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콩은 된장과 간장을 만드는 콩이다. 밥에 넣어 먹는 검은 콩이 아닌 노란 콩, 단단하게 여물어 있다. 콩깍지를 말린다. 가을 햇살은 뜨겁다. 다 모아 불을 지를 참이다. 여주 고구마라도 한 박스 사다가 구울 참이다. 불을 태우는 동안 사색과 명상이 모아진다. 흐트러진 일상에서 다져진 꿈으로 다가간다. 불빛이 가을 햇살을 만나 출렁일 것이다. 책을 태우는 속마음을 아는가? 빈 책장을 바라보는 마음 말이다. 그리하여 허옇게 비워낸 내 가슴 안에다 조선의 낡아서 빛나는 오래된 기억들을 담아낸다.
2006.11.02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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