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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52-반칠환, 은행나무 부부

by 나무에게 2013. 12. 23.

은행나무 부부 /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현대시학> (200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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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슬이 좋으면 손목 한 번 잡지 않고 살아도 두 섬씩의 자식이 열린다는 말이다. 어쩌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모른다는 설정에서 절로 미소를 금할 길이 없다. 그도 자의에 의한 게 아니라 바람이라는 놈이 수작을 부려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때쯤에서는 이건 억지도 심한 억지가 아닐 수 없다는 단정 섞인 비아냥의 보따리를 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매파를 지녔다. 바람이든 살을 간지럽히는 물결이든 발을 포근하게 해 주는 맨땅의 숲길이든 전류를 타는 것들이 있다. 우주의 자장같은 것이다. 이 기운은 공간의 거리나 입지성에 한정짓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 특성으로 인해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고, 눈에 닿지 않아도 손을 맞잡고 있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삼백년을 함께 한 부부라면 서로 등 뒤로 우주로 돌아 다가와도 절절할 사연일 게다. 그 사연으로 인하여 늘 발그레 홍시처럼 가슴이 두근거릴 게다. 그래서 보이지 않을 게다.
2006. 11. 03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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