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053-이인평, 안개의 섬―詩畵 스케치.9

by 나무에게 2013. 12. 23.

안개의 섬
―詩畵 스케치.9  / 이인평



안개에 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늘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세월이 안개 속을 흘렀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섬엔 안개가 맑게 걷히는 일은 거의 없고
날마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태풍이 불어오고 풍랑이 몰아치기도 했지만
누가 다치고 누가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섬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누가
새로 태어났다거나 죽었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았다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안개 속에서 만났다 안개 속으로 사라질 뿐
삶과 죽음에 대한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도 없었고
남을 헐뜯거나 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섬에선 굳이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말은 거친 바닷바람에 지워져버린 지 오래였고
섬에 남아있는 언어는 파도소리뿐이었다
모든 것은 안개에 덮여 있었고, 안개 속으로
절망이나 슬픔은 끼어들지 않았으며
운명의 그물에 걸려들어 신음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별 때문에 허덕이는 이도 없었고
고통을 주고받으며 미움에 길들여진 자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안개 속의 한 점이었고
삶의 행간마다 파도소리가 밀려들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시간과 마주 보고 있는 정적 속의 침묵뿐이었다
안개에 덮인 나날은 꿈결처럼 저절로 사라져 갔고
보이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
오랜만에 만나는 가슴을 뛰게 하는 시다. 어쩌면 風이여서 그런지 모른다. 風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한 요소임에도 어쩔 수 없다. 안개 속을 헤집고 들어 왔다. 들리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 안으로 끼어 들어야 할 것들조차 끼어 들지 못하고 있다. 뭔가를 웅엉거리고 있으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소리마냥 저 멀리서 존재의 이유처럼 버둥거리고 있다.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다. 따스한 손바닥을 비비며 나누고 싶은 미움의 에너지마저 소진되어 허옇게 바랬다. 그게 안개인 것이다. 마성 터덜을 빠져 나오면서 눈 앞을 가리는 안개에게 말을 건다. 굳이 말이 필요 없다면 지독한 안개여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도 깊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걷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 본질을 꿰뚫고 있는 진실에의 희망이다. 진실이 안개에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안개 속에서 커다란 뭉치로 떠돌고 있는 진실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6.11.03
온형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