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054-황희순, 가슴에 난 길

by 나무에게 2013. 12. 23.

가슴에 난 길 / 황희순


바람은 소리가 없다

누군가 만났을 때 비로소 소리가 된다
소나무를 만나면 솔바람 소리가 되고
풍경을 만나면 풍경 소리가 된다
큰 구멍을 만나면 큰 소리가 되고
작은 구멍을 만나면 작은 소리가 된다

아이가 찢고 나간 내 가슴은
바람이 없어도 소리가 난다
그곳엔 아예 길이 나 있어
아버지도 그 길로 가고 친구도 그 길로 갔다
오는 길 없는, 피딱지 엉겨 붙은
내가 그린 그 길엔

바람 없이도 늘 소리가 난다

<시안 2000 가을>

----------------------------
시인의 가슴에 묻어 둔 흙먼지가 숨을 막히게 한다. 한 여름 흙먼지 펄펄 날리는 신작로를 걷는 느낌이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그 길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이 가슴에 난 길이다. 바람은 그 길에서 어쩌지 못한다. 풍경 소리도, 큰 소리도, 작은 소리도 소용이 없다.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다. 구멍이 없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게 아니다. 찢어져 있다. 찢어져 있되 가늠할 수 없는 사방 팔방의 되풀이여서 그 길은 한 번 접어 들면 미로가 되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길이다. 슬픈 사연을 지닌 사랑했던 사람들이 지나갔던 길이다. 그래서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만드는 그런 길이다. 오늘은 그 길에서 서성여 본다. 내 가슴에도 시인의 가슴에 난 길처럼 심하게 통증으로 다가오는 흔들리는 길이 놓여 있다. 어지러워 몸을 가누지 못하는 길에서 허리를 쥐어 잡고 연신 기침을 하고 있다. 내 아이는 나보다 훨씬 커진 상처를 보듬고도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신 내가 아프다.
2006. 11. 03
온형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