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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55-박이화, 나의 포르노그라피

by 나무에게 2013. 12. 23.

나의 포로노그라피 / 박이화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혼신을 다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의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달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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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이렇게 쉬운 길을 돌아 가고 있다. 가까운 곳에 저질러야 할 일들이 도처 산재한다. 그런데도 먼길을 얼마나 돌아다니고 있는가. 가깝다는 것이 시의 진리다. 만져지는 것, 보여지는 것, 스치는 것, 더듬어지는 것, 오감과 육감이 다 가깝게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야 할 것들은 다 곁에 둔 것들이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보다는 가슴을 쥐어 짜내는 환희와 절정을 찾을 일이다. 사과를 깨물어 먹을 때 사각 거리는 소리, 그리고 한 입 가득 단내가 퍼질 때의 순한 기운, 이런 것들이 도처 산재한다. 도처에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건만, 애써 먼 곳으로의 여행만으로 취할 것을 찾아 내는 우를 범하고 있다. 아, 가까운 것들. 그리고 가까운 것들의 환희와 절정, 그것을 진하게 묻혀내고 싶다. 범벅이 되도록 친해질 수 있다면, 그 섞어짐은 또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 가까운 도에 이르는 게 그야말로 성인이 되는 일보다 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성찰이라는 게 그렇다. 눈먼 사람처럼 늘 허공만 더듬고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늘 여기'인 것이다.
2006.11.10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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