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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48-도종환, 별들의 휴가

by 나무에게 2013. 12. 23.
별들의 휴가 /도종환


며칠째 눈이 내리다 그친 보름날 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과 별 몇 개만 빈 하늘을 지키고 그 많던 별들이 어디로 갔
는지 보이지 않기에 문 열고 나왔더니 별들이 마당에 감자밭
에 산기슭에 수없이 내려와 반짝이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 내
린 눈을 따라 여기까지 내려왔나봅니다

작은곰자리는 깨밭 위에 있고 오리온자리는 마당 잔디밭
에 있고 전갈자리는 산딸나무 밑에 가 자리를 잡은 채 유리조
각처럼 서로를 되비추어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미리내 별
들 중의 일부는 언덕에서 골짜기를 덮은 눈을 따라 흘러내리
고 있습니다 어떤 별들은 이미 옷을 벗어놓고 어디론가 돌아
다니는지 별의 허물만 달빛에 반짝이는 것도 있습니다

지상에서 별을 그리워하며 눈길을 보내곤 하던 것들을 찾
아 산까치집에 내린 별도 있고 땅에 묻은 김장독에서 항아리
가 된 흙의 냄새를 맡거나 냉이나 달래의 향기에 몸을 섞고
있는 별들도 있습니다 늦가을 무렵 어미를 잃고 겨우내 혼자
떨며 지내고 있는 아기다람쥐굴 입구에 내려가서 속삭이고
있는 별도 있고 지붕 위에 내렸다가 고드름을 타고 미끄러지
며 신이 난 장난꾸러기 별들도 있습니다

여러 날 쉬지 않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별들도 휴가를 받
아 지상으로 여행을 내려오는 걸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그 별
들의 포근한 일박 눈이 눈으로 깨끗하게 남아 있는 동안 이
산골에서 며칠간의 휴가를 별들이 이렇게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하늘에서처럼 제자리에 붙박여 있거나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게 아니라 별들도 지상에 와서는 제가 만나고 싶던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산등성이를 넘기도 하고 새둥지에서
대나무 잎 위로 뛰어내리기도 하면서 돌아다니는 걸 보았습
니다 돌아가기 싫은 별들은 처음부터 북쪽 기슭으로 내리는
눈을 따라와 여러 날씩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하고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워 밤이 오고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과 제
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기도 하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창문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기도 하고 낮이면 제가
지닌 온기를 생강나무나 산수유나무 뿌리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며 지상의 며칠을 보내기도 하는 거였습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별의 숫자가 줄어들고 듬성듬성 자리
를 비운 별들의 흔적이 드러나는 게 그런 까닭인 걸 알게 되
었습니다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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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밤하늘과 함께 한다. 불빛 찬란한 도시를 좇아 가는 여행이란 대개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도중에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우고 허리를 펴거나 옷매무새를 고칠 때쯤, 하늘을 보게 된다. 수없이 창창한 청정지역의 별들은 경이롭다. 도시에 살면서 구경조차 못하던 광경을 만난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로만 설명되지 않기에 별들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작은곰자리를 찾고 오리온자리를 찾고 전갈자리를 찾는다. 어디가 북극성인지를 헤아리게 된다. 자상한 사람이 옆에 있어 알려 주는 날은 행복하다. 이내 돌아서면 또 다시 내 맘대로 별을 찾고 이름을 붙인다. 놀랍다. 별들이 지상에서 머물고 있다는 착안만으로 이 시는 피안을 넘어서 있다. 그리고 시침뗀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별의 숫자가 줄어들고 듬성듬성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의 까닭을 넌지시 남긴다. 내 안의 별의 숫자도 이와 같이 듬성듬성 자리를 비우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까닭을 넌지시 혹은 야트막하게나마 남기지 못한다. 하기사 정해진 이유나 비롯됨이 따로 있지 않은 탓이다. 내 안의 별들이 촉수를 낮추는 동안 무덤덤해지는 조명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다.
<2006. 9. 28.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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