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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0-서안나, 새의 팔만대장경

by 나무에게 2013. 12. 23.

 

새의 팔만대장경 / 서안나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무르나 단단했다 나무를 바닷물과 뻘밭에 묻어 결을 달랜다고 했다 나무의 습성을 내려놓는 치목(治木)의 시간이라 했다

겨울 천수만의 새들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뻘밭에 고개를 박는 새에게서도 산벚나무 냄새가 났다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옹이가 없는 둥근 선을 지녔다

새가 새를 끌고 날아오르는 것은 몸 안의 팔만 사천 자를 지상에 탁본하는 순간이다 새는 뒤틀리거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 경판과 경판 틈새 바람이 잘 통하였다 서둘러 날아올라도 부딪치거나 새의 모퉁이가 상하지 않았다

팔만대장경을 읽는 데 30년이 걸린다고 했다 당신도 그러하다 물속의 젖은 부처가 손을 내밀어 내 몸의 비린 경판을 읽는 것이 한 생이라면 사랑은 여기까지다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기억이 시베리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천수만 겨울 오후 뻘밭 가득 쓰인 육필 경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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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거나 부드럽거나 단단하다는 말은 충만이다. 내적 충실감에 관여된 말이다. 왼발에는 충일감을 느끼고 있으나 오른발에서는 삐그덕대는 헛헛함이 함께 한다. 그래서 이리갔다가 저리가기도 한다. 팔만대장경도 그렇게 만들었다. 가득찬 충만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삐그덕 거리는 판자를 주무르면서 무르다가 부드럽다가 단단해지다가 벚나무였다가 자작나무였다가 겨울 눈내리는 벌판이기도 했을 것이다. 천수만과 팔만대장경이 극적으로 만났다. 서로 그리워하다가 덜커덩 착실하게 만나 부둥켜 안더니 스르륵 벗겨진다. "사랑은 여기까지다.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천수만과 팔만대장경이 사라졌다. 그러나 가슴 깊숙히 드넓은 뻘밭으로 가득 쓰인 새들의 발자국인 육필 경전은 단단해지고 있다. 아니 물러터지고 있다. 아니 부드러워지고 있다. 어쩌면 그 어느 것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누구나 결을 달래는 치목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안의 바닷물과 뻘밭이 펄펄 살아 있어야 한다. 버려진 들판, 나대지의 황량함을 뒤집어 엎고 축여 바람으로 살아있게 한다. 스스로 상하지 않도록 가꾼다. 30년이 걸리든, 50년이 걸리든 그게 살아있음이다.(201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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