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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1-유현서, 감자 캐는 날

by 나무에게 2013. 12. 23.

감자 캐는 날 / 유현서

 

 

고자리 먹기 전에 서둘러라 널찍이 떨어져 호미를 들어라 찍히거나 끊기면 안 된다

이젠 들을 수 없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들을 들쳐 업은 옥수숫대가 감자밭 저쪽에서 슬며시 내려놓는다

네 살 박이를 떼어놓고 간 어미 혼자 쭈그리고 앉아 연신 감자를 낳는다 씨알 굵은 감자마다 실금이 간다

까맣게 든 멍이 피멍이라지 한 뿌리 한 덩이인 게 감자라지 에린 맛엔 굵은 눈물이 명약이라지

감자 한 알마다 박힌 한숨
감자 한 알마다 박힌 옹이

비장한 알뿌리들 
줄줄이 엮여 나온다

애를 맡아 줄 사람 찾았어요 주말쯤 보내야 겠어요 
호미에 찍힌 감자 하나가 허옇게 나뒹군다

마당한쪽에 피운 모깃불에 풀벌레소리 모여든다
끊긴 감자 줄기에 호미로 앉아 찌르르 찌르르 울어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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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서 감자를 캐는 풍경이다. 감자에 토실한 흙이 툭툭 묻어 나온다. 한숨과 옹이라기 보다는 풍요와 건강함이다. 감자가 들어간 요리는 모두 좋아하다 보니 줄줄이 요리가 떠오른다. 마당, 밭, 감자, 그리고 계절이 스친다. 누가 내 옆에 있었을까. 아마 신나했을 것이다. 아마 멋도 모르고 쭈구려 앉아 주절주절 떠들었을 것이다. 그냥 감자 캐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열심히 그 일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감자 캐는 일을 해 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쯤에서 되돌아 보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기억이 날림일까? 분명 감자에 건실한 흙이 달라붙어 몇 조각 카스테라 같이 흘렀던 것인데, 그게 왜 손에 잡히지 않을까. 손에 잡히는 것만 기억하게 되는 나쁜 습관은 또 언제부터 내 옆에 와 있었을까. 갈수록 관념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지워지고, 갈수록 손에 묻힌 참한 스킨십만 발달하고 있다. 끊어지거나 피멍이 들면 곤란한 감자 캐는 날의 긴장이 나를 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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