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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69-신경림, 파장

by 나무에게 2013. 12. 23.

파장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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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더라.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신경질이 나더라. 이 시를 외우고 다니는 근사한 후배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 일어나서 이 시를 읽는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웠다. 저 후배가 못난 놈이 아닌데 못나려 한다고. 하지만 살다 보면 특별하게 못나지고 말더라. 결국 살아가는 이유에 한 몫하는 것이 못나지는 과정 아닐까. 못나지 않고 배겨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잘난 놈은 또 뭐냐?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잘난 놈끼리 하라고 그래'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잘난 사람들 아닐까? 제천 말로 '지가 하고 싶은데, 지가 못하니까, 잘난 놈이니까' 하면서 빈정댄다. 이 빈정이 또 얼마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역동인가. 막상 지가 하면 남이 그렇게 수근대는지 왜 모를까. 오히려 뒤에서 딴말하지 말라고 역정낸다. 극은 극을 만나고, 무는 무를 만난다. 그리워지는 게 많아질 때 못나지는 게다. 섰다도 색시도 소주도 모두 가짜다. 못난 놈이 진짜다.
(2008. 02. .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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