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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67-장석주, 달의 뒤편

by 나무에게 2013. 12. 23.

 

달의 뒤편 / 장석주

 


그믐밤이다. 소쩍새가 운다.
사람이건 축생이건 산 것들은
사는 동안 울 일을 만나 저렇게 자주 운다.
낮엔 상가(喪家)를 다녀왔는데
산 자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풍년이었다.
무뚝뚝한 것들은 절대 울지 않는다.
앞이 막혀 나갈 데가 없는 자리에서 
‘죽음 !’이라고 나직이 발음해본다.
혀뿌리가 목젖에 붙어 발음되는
이 어휘의 슬하에 붙은 기역 받침과
막다른 골목의 운명은 닮아 있다.
저녁 산책길에서 똬리를 튼 뱀을 만나고
저수지에서는 두어 번 돌팔매질을 했다.
작약 꽃대가 두 뼘 넘게 올라왔다.
직립한 자의 가는 길이 캄캄하다.
그믐밤이다. 직립인(直立人)의 앞길이 캄캄하다.
소쩍새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시는 커피는 쓰고 깊고 다정하다.
다시 혼잣말로 ‘죽음 !’해 본다.
바닥이라고 생각한 그것은
아직 바닥이 아니었다.

(월간 숲, 2008. 02, "늑대가 사라진 이후의, 진실" 중의 인용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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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은 부럽다. 늘 노자와 장자 읽기에 심취해 있다고 프로필에 적혀 있다. 내가 아는 써클 선배도 그렇다.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노장을 읽는다고 했다. '아, 나는 노장을 읽어!', 이 한 마디가 왠지 모르게 그를 신비하게 여기게 했다. 그의 말에는 늘 노자와 장자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흔한 말을 하는 일상에서도 나는 노자와 장자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쉬운 말에도 깊은 뜻이 있어 보였다. 시인은 '죽음!'이라는 말을 발음한다. 나도 발음해본다. 혀끝을 달아오르게 하면서 끝을 빠르고 닫아 버리는 장엄이 있다. 어머님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 산 자들이 내는 풍년의 웃음소리가 시인에게는 울음소리로 되살아났다. 운명은 그렇듯 내리사랑이다. 살아 있는 자들이 있어 사라진 자들은 축복이다. 축생의 영과 사람의 영이 뒤엉킨다. 시인에게 그믐밤과 소쩍새와 울 일과 상가와 똬리 튼 뱀과 두 뼘 넘게 올라온 작약 꽃대가 모두 직립의 소산이다. 직립 말고 낮게 드리운 수평의 꿈에서 만개한 매화나 벚꽃을 기다리는 것은 시를 읽는 내 몫이다. 더욱 절절해지는 만개, 활짝 핀 그 얼굴.
(2008. 02. 15.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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