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073-김소양, 별 소나기

by 나무에게 2013. 12. 23.

별 소나기 / 김소양


영월 마대산 산골마을 어둔이골에서 자던 날이었습니다 뒷간까지 내려가는 것도 무서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소피를 보고 있을 때였지요 하늘 구석구석 촘촘히 뚫어놓은 작은 창, 그 구멍마다 들이대고 있는 눈과 눈에서 은빛 명주실이 소나기로 쏟아지며 저를 휘감아 챌 듯 손을 뻗쳐오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뿔싸! 화안히 드러난 엉덩이 감출새도 없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문고리를 단단히 걸어 잠갔는데요 아랫목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는지 나를 내려다보던 저 너머 그 누군가가 그리웠던 건지 밤새 뒤척이느라 풀벌레 소리에 귀가 젖었습니다.

석전시 동인 제 8시집, [동백꽃을 보다], 우리글

-----------
은빛 명주실을 뽑아내는 일은 오래된 풍경이다. 별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가득한 마대산의 밤. 별이 제 무게를 못이겨 쏟아지는 순간, 한 솥 가득 고치를 삶아 뽑아내는 지상의 숭고함과 하늘의 숭고함이 만난다. 맑디 맑아 가슴으로 안아 줄 수 없을 때 슬프다. 문고리를 잠글 수밖에. 그리움도 아랫목이 뜨거워지면 잠을 청할 수 없다. 다만 풀벌레 소리에 귀가 젖었다고 딴청을 부릴 수밖에. 움직임(動線)과 봄(視)과 보여짐과 닿음(觸), 그리고 내면과 들음(聽)이 한숨에 내달린다. 호흡은 마대산을 향하고 있다.
2008. 02. 02. 온형근
-------
(한국주택관리신문, 8월호 원고)

'::나무와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5-이영광, 숲  (0) 2013.12.23
074-이면우, 봄밤  (0) 2013.12.23
072-정희성, 시인 본색(本色)  (0) 2013.12.23
071-유현서, 감자 캐는 날  (0) 2013.12.23
070-서안나, 새의 팔만대장경  (0) 201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