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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5-이영광, 숲

by 나무에게 2013. 12. 23.

숲 /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에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작은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사나이를 고요히 지나치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한 사나이와 나무와 허공을,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은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骨多孔症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통과시켜 주고도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1998년『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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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나무를 보면서 살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싫어 자꾸 나무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렇다고 해서 멀어질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이고 평생 지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머뭇거리며 튕기고 있다.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정직하고 측은하다. 이영광 시인의 나무에 대한 통찰을 읽고는 속이 뜨끔했다. 나무의 헛헛함을 보았다는 것은 나무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는 말로 치환될 것이다. 속 깊이 절절하게 아프다. '나무들의 손아귀가' 찢어졌는데 아프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래서 작아지고 쓸쓸한 것이다. 그러니 껴안고 어루만지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렇게 단단하고 틈없이 끌어 안고 있는데도 바람이 송송 지나간다. 바람이 만들어낸 허공에 골다공증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그게 시인이고, 나무다. 내가 바라보는 나무는 곧 일이다. 씨뿌리고 기르고 가꾸는 땀과 함께 있다. 아주 가깝다. 조금씩 떨어져야 한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구멍 송송 뚫린 가지가 만들어 내는 허공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2009. 8. 26.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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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택관리신문 10월호 원고 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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