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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6-박정대, 되돌릴 수 없는 것들

by 나무에게 2013. 12. 23.

되돌릴 수 없는 것들 /박정대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적막한, 적막해서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 1990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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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바람이 분다. 가을 바람이라 불린다. 소소하게 옷깃을 매만지게 한다. 평소 나풀거리던 속마음들이 살갗에 달라붙는다. 찾을 수 없기에 기원을 묻지 않는다. 따져지지 않는 것들에 빠져 새벽을 맞이하는 일은 줄어야 한다. 지난 여름 들이켰던 생각들은 바짝 말랐다. 습기 조금만 먹어도 떨어질 가벼움이 지난다. 비로소 쓸쓸함이라 이름 붙인다. 부서지기 전에 제 무게를 버팅길 수 없는 사랑들이 길바닥으로 붐빈다. 오가는 생각들은 제 스스로 구르다 쓸쓸함의 발길에 채인다. 너무 적막하여 아득해진다. 시인은 말한다.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라고, 나는 말한다. '어찌하여 나의 쓸쓸함에는 출구도 없이 시작만 있는가'라고.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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