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077-안상학, 국화

by 나무에게 2013. 12. 23.

국화 /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제 목숨껏 살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
몇 송이 꽃 달고 서리도 이슬인 양 머금다 가게

지난 가을처럼
꽃 욕심 앞세우지 않기로 한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
이슬도 무거워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문하던
그 모습 다시 보기는 아무래도 쓸쓸할 것만 같아

올해는 나도 마음의 가지를 치지 않기로 한다.
상처만큼 더 웃으려드는 몰골 스스로도 쓸쓸하여
다만 한 가지 끝에 달빛 닮은 꽃 몇 달고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슬픔을 위문하며
서리라도 마중하러 새벽 길 가려한다.


시집 『그대 무사한가』『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등

---------------------
게으른 사람은 한꺼번에 국화를 잘라준다. 차분하게 모양을 보면서 대화할 틈이 없었기에 두두둑 치고 만다. 예취기로 벌초하듯 그렇게. 그도 아니면 몇 송이 꽃 삐죽 나와 다복한 꽃을 볼 수 없다. 손으로 순을 집어 내는 숱한 날들이 있어서 국화는 자태를 뽐낸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는 의연한 척 시치미를 떼는 게 국화다. 너무 많은 상처로, 이슬조차 무거워한다. 고개를 숙이는 날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제 감당에 벅찬 것이다.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문하던' 꽃들의 모습에서 나를 찾아낸다. 웃을 일이 많지 않다고 스스로 웃어제끼는 일도 줄여야겠다. 내 주변에서 나를 처음 낯설게 하는 모든 현상들로 꽃을 피워야 한다. 익숙한 꽃송이를 멀리한다. 달빛 닮은 꽃과 처음 태어나는 슬픔 닮은 꽃을 피워내는 일상이어야겠다. 가을 국화에 꽂힌 낯설음으로 하루를 열어 본다. (온형근)

-------------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 12월호

'::나무와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9-온형근, 모감주나무  (0) 2013.12.23
078-김인자, 일월저수지  (0) 2013.12.23
076-박정대, 되돌릴 수 없는 것들   (0) 2013.12.23
075-이영광, 숲  (0) 2013.12.23
074-이면우, 봄밤  (0) 201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