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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9-온형근, 모감주나무

by 나무에게 2013. 12. 23.

모감주나무 / 온형근

 

 

꽃이 피어
아 꽃이 피었구나 했다
그 사이에
있고 없음


묻고 답함이 스쳐갔다

그 꽃이
살짝 입힌 노란색 꽈리로
새 옷 입은 것을 보고서야
꽃은 지는게 아닌 것을
꽃이 하나인 것을

 

내 눈길이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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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에는 유난히 나무가 등장한다. 예감했듯이 내 삶이 어느 순간 나무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을 꿈꾼 적은 없다. 내 시에 나무가 많다는 것을 태생적 한계라 여긴 적도 있어, 의식적으로 나무의 등장을 줄여보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꽤 많은 시인들이 나무에게로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정도라면......하면서 외면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시의 출현에 입을 모아 침을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신춘문예 따위의 각종 등단 작품에 노골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가능하면 나무를 훔쳐보지 않노라고 스스로 되뇌이고 있었다.

나무를 모르니 나무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86년 9월 이후다. 그때 소나무 종류 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곰솔, 심지어는 잣나무, 스트로브잣나무 등을 그저 소나무류라고 했다. 들은 풍월은 있는데 대체 이를 외우고 분별하는 게 무슨 소용있을까 했다. 또 구별하여 알고 있다가도 며칠 지나면 다시 지워지는 게다. 나무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한 너스레와 심리적 기작에 대하여 관찰하는 일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주로 사람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집중한 시절이기도 하다.

그때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일찍 꽃부터 피우는 개나리, 진달래, 아주 큰 꽃인 백목련 정도의 나무나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삶의 지장이 아니라 대오의 각성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고는 나를 만나 나의 이야기를 듣는 대상을 변하게 할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스로 자연의 위대함에 대하여 책을 읽으면서 정리한다. 내게 자연은 나무로 대변되는 환경의 연속이었다. 그때 교보문고를 다니면서 몇 안되는 자연 관련 서적을 구입하는 일이 계속된다. 스스로 사상적으로나 생활인으로서 다져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때 나무가 손을 내밀었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를 공부한지 6개월만이다. 이미 모든 주말은 광릉수목원, 서울대안양수목원, 천리포수목원 등으로 오가는 일에 맡겼다. 여주에서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걷곤 하면서 그 일은 자석처럼 나를 이끌었다. 그때 내 애인은 나무인 것이 분명했다. 자다가도 어떤 나무를 공부하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책을 찾아보곤 했다. 임경빈 선생의 '나무백과'라는 책은 복음이었다. 아주 곱게 모셔 놓고 읽곤 했다. 지금도 나무이야기는 그 이상인 것을 찾지 못한다. 임경빈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실제로 시집을 한 권 출판하신다. '나는 나무입니다'라는 시집이다.

그때 나는 나무를 주제로 시를 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무를 통하여 세상을 빗대는 대화술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그때 나의 이야기는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신선함이 있었다. 마악 시작된 다양한 사회적 긴장을 덜어 내면서 다른 절대자의 입을 빌려 부드럽게 전개할 수 있는 화법인 것이다. 모감주나무는 비교적 일찍 내 안에 자리한 나무이다. 자생수목이면서 조경수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나무로 점찍었던 나무이고 종자 채취 후 파종하여 새 생명을 수없이 받아 낸 나무이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때 이 나무를 아는 사람 많지 않았다.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그 자리에 꽈리로 열매가 만들어지는 나무다.

이 시는 살고 죽음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나무와 함께 자연을 읽고 함께 하면서 만들어진 사생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살고 지는 게 어디까지가 사는 거고, 여기서부터가 지는 게다라는 구별이 뭉그러졌다. 모감주나무 한 그루에 천지가 담겨 있었다. 내 안도 그랬다. 꽃이 졌을 때, 나무가 끝난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생명이 담겨져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게고, 죽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말로 혹은 글로 깨달은 게 아니라, 모감주나무와 몇 년동안 만나고 비비고 어루만지며, 열매 맺고 생명을 만들어 내고 하면서 하나 된 노릇이다. 아름다움은 열정을 지니고 있고, 그 열정은 반드시 반사되는 것을 배운다. 따신 것들은 메아리가 있다. 삶에 대한 젖은 시선은 죽음 조차 반짝이게 한다. (2008. 6. 23.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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