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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8-김인자, 일월저수지

by 나무에게 2013. 12. 23.

일월저수지 / 김인자


술판 끝나고 심야에 찾아간 일월저수지
어디서 왔는지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물오리 떼들
와그르르 짝짓기에 수면이 휘청거린다
처음 물오리들은 어떻게 이곳으로 이사오는 길을 알았을까
둑 발치께 엎드려 사는 갈대들은 알 것이다
숨을 죽이고 문구멍으로 몰래 훔쳐본 사랑이
왜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밤
대머리 푸른 잎 조금 남은 건너 숲에는 짝사랑에
홧병 든 사내처럼 가을볕에 가슴 쩍 벌어진 밤송이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뛰어내려 바닥에 몸을 포개고
빌딩 모서리에 걸려 발목 삔 바람도 둑에 앉아
그들의 신음소리를 훔쳐 듣고 있다
사랑 앞에선 누구나 몸서리를 치게 되는 것일까?
늦은 밤 저수지는 입을 틀어막고 몸만 부르르 떨었다
상처는 꿈을 위장한 어둠이 덮어주리라
누군가 낮 동안 못다 부른 노래가 있었다면
그 밤 물의 정거장에 쉬었다 가는 바람이 불러주리라
나만 지상에 방 한 칸 무상임대로 사는 줄 알았으나 매일 밤
일월저수지에 복면을 하고 공짜로 세든 물오리들도
힘 좋은 사내등살에 곤죽이 되어 여인숙 뒷문으로 도망치는 그녀처럼
아침이면 희멀건 낯빛으로 저 숲 뒤 골방으로 돌아가
곤한 잠에 빠질 것이니 아무리 길어도
그들의 밤은 짧을 수밖에 없다
이제 나는 일월저수지 수면에 뜬 창백한 낮 달
보아도 못 본 척할 것이다

 

김인자 :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 슬픈 농담,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나는 열고 싶다, 겨울 판화
산문집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그대 마르지 않는 사랑
여행서 : 포구, 걸어서 히말라야, 명상 산책, 아프리카 트럭여행, 남해 기행, 사색 기행, 나는 캠퍼밴 타고 뉴질랜드 여행한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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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저수지는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예전에는 여기 저기 오리탕을 팔거나 산발적 어수선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대머리 푸른 잎이라도 근근하게 버티고 있었다.  새로 심은 나무들이 주변 산책로와 어울려 깔끔해진 지금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시인은 일월저수지에서 물오리를 만난다.  그리고 갈대와 밤나무에 매달리거나 떨어진 밤송이와 저수지 둑과 주변의 아파트 빌딩에 부딪히는 바람을 만난다.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물오리들이 밤에 왜 보였을까.  낮에는 곤한 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불면의 속성은 그렇다.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낮동안은 쾌적한 잠자리의 연속이다.  그러나 어둠이 밀려 와 사방이 고요해질 때면 부시시 일어나 곤죽이 되도록 세상과 부대껴야 한다.  그게 불면의 내면이다.  불면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깨어 있게 하면서 동시에 환한 낮의 번잡함 속에서 편한 잠을 주기도 하는 이율 배반의 못된 습성을 지녔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고,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시인에게 주어졌는지 모른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오랜 세월을 관통하는 자연과 함께 주물러지는 따뜻함일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자신에 대한 채찍일 수 있다.  그래서 보아도 못 본 척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20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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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택관리신문, 2010년 1월호 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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