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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074-이면우, 봄밤

by 나무에게 2013. 12. 23.

봄밤 / 이면우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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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시인이 이면우시인의 시 '벚꽃 단장'을 선물하였다. 그래서 이면우 시인을 찾았다. 1951년생으로 1997년『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시집으로『저 석양』(1991),『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2001) 가 있다. 등단년도가 나와 같다. 나이는 대략 10여년 많다. 내친김에 그의 시 몇 편을 읽다가 '봄밤'을 찾았다. 내 큰 딸도 현관 잠그는 담당이다. 그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늘 문단속을 하고 나서야 안심한다. 내내 보아왔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보니까 큰 딸도 같은 생각을 어려서부터 해 왔던 게 분명하다는 심증이 짙어진다. 집마다 이런 아이들이 꼭 있을 것이다. 이면우 시인의 '얼굴에 붉은 꽃, 소리없이 지나가는 중'이라는 말이 시 전체를 기막히게 끌어 안는다. 마치 정사의 사전 징후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인가. 은근하다는 말로 대신하면 될까. 사랑은 은근함의 연장일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내 사랑도 은근할 뿐이다. 세상이 은근한 정으로 가득하여 서로 헐뜯고 잘난 척 덜 했으면 싶다. 그저 얼굴에 슬쩍 뭔가 징후가 생겼다가 소리없이 슬쩍 지나가고 마는 그런 은근함을 이 봄밤에 들이키고 싶다. 가슴 가득 오래 남도록....
(월간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 9월호 송고)
(2007. 2. 28..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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