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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가장 쉬운 것으로의 일로매진

by 나무에게 2013. 12. 24.

새벽 산책 후, 갑자기 사유의 물결을 탄다. 오랜만에 일로매진(一路邁進)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나의 길로 가고 나아간다는 말이다. 갈 매, 나아갈 진이다. 가고 나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게 참 많다. 사람이 누리는 삶을 한평생이라고 한다. 이 한평생 역시 매진하는 것이다. 가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고 나아가는 매진이다. 그러나 사유는 그렇지 않다. 수시로 사방, 팔방으로 휘어지고 되돌고 맴돈다. 가장 쉬운 것으로의 일로매진이 현재의 입시 제도에 의해 모든 교육이 좌우되는 교육 방식이다. 이런 체제에서의 교사나 교육 당사자들은 크게 고민할 게 없다. 붕어빵 찍어 내듯이 오로지 하나의 일로매진인 입시 위주의 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 되니까.

농생명교육은 그렇지 않다. 교육 정체성에 있어서 너무나 다양한 입지를 지녔다. 가령 요근래 수원을 비롯한 몇 학교에서 학교의 이미지와 존재감을 사회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한 서울대학교 진학이 몇 명만 나와도 좋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일로매진하는 교육 방식은 아니었다. 이건 너무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그 넓고 광활한 농생명교육의 지평을 가두는 일이다. 고민하거나 궁리하지 않고 쉽게 교육 주체들이 교육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게끔 하는 가치관이다. 농생명교육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가치관이 존중되어야 한다. 오로지 대학을 위한 입시 위주의 교육, 거기에서 상처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되살리는 교육, 그것이 농생명교육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대학 입시를 위하여 일로매진한다면 아류이면서 사기다.

농생명교육은 교육 형태에서 하나의 본류를 지녀야 하고 지켜야 한다. 그래서 매우 다양하고 분주한 형태일 수밖에 없고, 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폭넓은 사고의 교육 당사자들이 있어야 한다.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뛰는 게 아니라 여러 길을 통하여 하나의 길로 모이는 게 아니라, 여러 길을 통하여 다시 여러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농생명교육이다. 어제 토론을 했다. 포럼이라고 명명을 하고, 이것을 농생명교육의 정체성 확립이라고 했다. 이미 정체성은 뚜렷하다. 확립이 아니라, 여태까지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제 그 생각을 했으니 신통하다고 서로 알리고 공부하는 자리이거나, 이래야 한다고 하나의 생각을 모두의 생각으로 합쳐야 한다고 하는 자리일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소비는 있는 데 생산이 없다. 소비 욕구만 있지 조용히 이를 생산하는 농생명산업 종사자가 없다.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데, 정체성을 지닌 교사가 없다면?, 마이스터 교육, 마이스터 학교를 만들겠다는데 전공 분야에 대한 마이스터 교사가 없다면?. 생산이 없다. 가분수를 이룬다. 머리는 크고 바닥이 절벽이다. 밭에 풀이 있는데, 유기농 생산을 한다는 데, 학생들과 풀을 뽑아야 하는데, 이 풀을 어찌 할꼬? 하고 엄두를 못내는 현실에서 마이스터 교육, 마이스터 학교, 농생명교육의 정체성 확립이 가능할까? 이렇게 어려우니 다들 오로지 가장 쉬운 일로매진, 대학입시 쪽으로 가는 게 아닐까. 농생명교육의 정체성은 전공분야별로 소리 없이 내세움 없이 풀을 뽑고, 김을 매고, 가꾸고, 심는 일이다. 그런 매개체를 통하여 인간을 완성하고,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가치를 함양하는 일이다.

여기저기 목소리만 높여서 될 일이 아니다. 포럼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그들이야말로 일찌감치 농업교육, 농생명교육의 생산적인 면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일찌감치 힘든 생산의 현장에서 제 3, 제 4의 길로 나선 사람들이다. 힘드니까, 다른 일을 모색하고 찾아간 것이다. 어떤 근사한 말로 포장하더라도 그들의 그 능력은 농생명교육의 생산 현장에서 평생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들은 입으로 정책으로, 관계로 이루어지는 인문학적 삶과 직업의 세계를 향하게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포럼을 한다. 이 포럼은 현장에서 오로지 평생 포장을 운영하면서도 강의를 떠나지 않은 소박한 사람들을 모아서 하고 싶은 말을 하게끔, 아주 속시원하게 말이 나오게끔 하는 자리여야 한다. 둘러 앉은 사람들이 이들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경험담과 비전에 대하여 기립박수를 치는 그런 자리여야 한다.

가장 쉬운 일이 입시 위주의 교육이고, 입으로 하는 정책과 인간 관계를 맺으며 하는 사기성 짙은 그렇고 그런, 좋은 게 좋다는 교육이다. 가장 어려운 교육이 소비가 없더라도 꾸준히 생산성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교육이다. 농생명교육은 소비와 상관 없이 꾸준히 학생들과 흙과 동물, 식물을 매개체로 하여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깨달음, 그리고 삶이라는 게 그리 허황맹랑한 게 아니라는 인간 욕망의 정체성을 지키게 해 주는 근저를 안겨 준다. 그런 교육의 현장이 자꾸 입과 정책과 인간관계를 위하여 소비되고 있다. 생산이 없는 사람일수록 남이 생산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소비하고자는 욕구가 크다. 이러다 생산 없는 사람에게 제공할 콘텐츠조차 없어질까 두렵다. 말도, 정책도, 인간관계도 결국 성실한 현장에서의 진정한 농생명교육이 생산될 때, 소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하는 사람 따로, 소비하는 사람 따로다. 따로 노는 것이 잦아지는 것 또한 문제다.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함께 놀아야 한다. 생산하는 교사, 생산하는 교육, 생산하는 농생명교육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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