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무와함께

골격을 짚어내는 깨달음

by 나무에게 2013. 12. 24.

조선조 5 현이며 동국 18 현 중의 한 분으로 일두 정여창 선생을 꼽는다. 함양 서하면 봉전마을에 있는 군자정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 마을이다. 이 처가 마을에는 정선 전씨 문중의 전세걸 진사가 있었는데, 이들이 선생을 기리고자 1802년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여창 선생이 1450-1504의 생애를 살았으니, 돌아가시고 난 뒤, 300여 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0여 년이 지났다. 다랑쉬 회원들이 이곳을 찾은 것은 정여창 선생, 전세걸 등 마을 유지들, 그리고 현세까지 500여 년을 관통하는 행위다. 500여 년 전의 정여창 선생이 자주 쉬던 곳, 너럭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군자정이라 이름하여 군자의 덕목을 배우고 익히는 의미가 있다. 군자정에 오르니 앞의 솔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성찬이다. 절벽의 풍광이 가히 쾌속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여창 선생은 영남 사림파의 종맥을 잇는 분이다. 경관을 경영한 것은 그 후세 사람인 전세걸 선생이지만 이곳의 의미소로 정여창 선생을 대입한 것이다. 군자라고 칭하는 정여창 선생은 고려말 정몽주 선생에서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중심에 있다. 조선 선비 살해 사건의 출발점이라 하는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의 정점에 김종직이 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유자광이 문제 삼아 그 시발이 된다. 김종직은 김숙자의 아들이고, 지방관을 자처하여 영남 지방에 거주하면서 문파를 만든다. 훈구파가 공신 집단이라는 동질성을 확보하였다면 사림파는 김종직에 의해 만들어진 학맥이라 할 수 있다. 훈구파가 역성혁명파 신흥사대부 집단이라면, 사림파는 온건개혁파 신흥사대부였다. 주로 향리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지도한다. 어쩌면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학맥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는지 모른다.

조선시대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구도는 소위 사도세자를 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찬탈 인식에 반대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과 비교라 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토지를 둘러싼 경제적 이권 다툼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도 경제적 이권에 의해 대선과 총선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렇지만,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 역시 굉장한 부호다. 훈구파가 사림파의 토지까지 손을 대고, 둔전과 영둔전까지 먹으러 드는 것에 반기를 든 것은 사림파다. 김숙자의 장인인 박홍신은 밀양의 지방 호족이다. 장인 사망 후 막대한 유산을 받는다. 이때는 남녀가 균분 상속하던 조선 초기의 관습이 있었다. 실제로 김종직이 관직에서 물러날 때 집안에 한 섬의 저축도 없다고 나라에서의 배려를 제자들이 주장했을 때, 대사헌 김려석은 '김종직은 경상도 세 고을에 노비와 전장이 있는데 말도 안된다.'고 반박한다. 이는 김종직의 원고향인 선산과 어머니 고향인 밀양, 그리고 처의 고향인 금산을 지칭한 것이다.

 

 

정여창도 '성종실록'에서 악양 농장에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한 것으로 나온다. 김굉필 역시 여러 농장에 노비를 가진 재력가이다. 그러니 사림파가 조선시대 핍박받는 집단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사림파 역시 조선의 지배층이었고 지주였던 것이다. 경관을 경영한 사람이라면 지배층이고 지주여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리학에 뿌리내린 유학의 맥으로 이데올로기적 존경을 받는다. 봉전마을의 전세걸 역시 마을의 토호 세력이고, 정여창 선생의 처가 마을이었던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니 명분을 띄워 정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게다. 반석처럼 커다란 바위 위에 정자가 위치한다. 그 앞으로는 화림계곡의 풍요롭고 맑은 물이 흐른다. 앞의 절벽에서 솔바람이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준다. 가끔씩 철렁이며 차디찬 겨울 계곡 물소리가 심성을 단정하게 이끈다. 소리와 봄이 하나다. 사물과 봄과 내가 일체의 형상을 지닌다. 나는 존재하는 실체다.

 

 

군자정 앞에 심겨진 물푸레나무를 만난다. 물가에 물푸레나무가 있다. 정자 근처에 물푸레나무가 심겨진 것은 자주 목격되지 않는다. 우연히 이곳으로 씨앗이 날아와 심겨진 것으로 보인다. 군자정을 빠져나오면서 잠시 멈칫댄다. 바람에 이끌려 길 가장자리에 잔뜩 모여 있는 물푸레나무 열매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잠깐이지만 망설임이 있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주워담는다. 이 열매를 봄에 파종하여 물푸레나무 묘목을 얻고자 함이다. 그리고 함께 답사하였던 다랑쉬 회원들에게 나무를 나누어 줄 것이다. 작은 포트에 심거나 분에 심어 전달해 주면 의미가 새로울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이렇게 작은 생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미소로 발전하고 그 의미소들이 모여서 문화의 내용으로 덩어리지는 게 아닐까 싶다. 물푸레나무를 생산하는 것은 전세걸 선생이 정여창을 기리며 만든 군자정처럼 그 후세인 다랑쉬 회원들에게 이어지는 의미 있는 생명의 고리가 되는 일이다.

정여창이 함양군수로 가서는 학사루에 걸려 있는 유자광의 친필 액자를 불태워 버린다. 유자광이 남이의 옥사 등을 통하여 권력만 좇는 소인배라는 것이다. 이때 이미 무오사화의 싹이 튼 것이다. 요즘 새 정부가 준비되면서 지방 총선에 기웃대는 대선에서의 특보와 교수진들도 권력을 찾아 이끌리고 있다고 한다. 가히 볼만하다. 그러나 불태우고 경멸하는 일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다. 어찌된 노릇인지 정의, 도와 덕 같은 결 고운 가치관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자리를 피한 것인지 숨어 있는지, 귀양을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귀양을 간 것이 분명하다. 유배지에서 줄기 시퍼런 목질을 키우고 있다. 함양에서 학사루를 다녀오지 못한 일이 아쉽다. 군자를 기리며 정자를 만드는 행위는 시대의 절실함일 수 있다. 이 시대의 절실함에 비추어 실천할 수 있는 행위는 없는가. 말이 없는 자연을 바라보면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연 앞에 겸허해지는 배움이 곧 실천의 밑천이 된다. 군말 없는 사람이 무섭듯이 자연에서 골격미를 배운다. 골격을 짚어 내는 깨달음이 거듭되어야 한다.

(월간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 9월호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