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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함께

광풍제월을 그리워하는 선비_소쇄원

by 나무에게 2013. 12. 24.

광풍제월(光風霽月)을 그리워하는 선비_소쇄원

소쇄원은 경계가 없다. 여기 저기 그저 막힘 없이 통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연 속에 인위적인 요소라는 게 힘을 받을 수 없게끔 되어 있다. 건축과 자연의 경계 역시 사라진다.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진다. 어디서부터가 무엇이고, 언제부터가 시작이고 끝이다라는 구별은 초월 속에 묻힌다. 소쇄원은 그렇다. 스스로 나아갈 바를 규정하지 않고 존재한다. 구석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이다. 소쇄원인 것이다.

 

조경 답사를 시작한 곳이 내 기억으로는(기억에 남아 있기를) 소쇄원이 그 시작이다. 여전히 시작이고 끝이고 할 것이다. 그 소쇄원이 거기에 있어 내가 그곳을 찾을 수 있는 동안은 시원이고 도중이다. 그래서 소쇄원은 묘한 감흥을 준다. 식상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남다른 애틋함과 아낌이 스며 있다. 소쇄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광풍제월이다. 앞서간 한국의 선비들은 하나같이 광풍제월에 어깨가 바로 펴지곤 했다. 누구나 광풍제월을 닮으려 했다. 호연지기라는 게 달리 말하면 광풍제월에 다름 아니다. 나 역시 소쇄원을 광풍제월로 담는다.

 

소쇄원의 공간을 담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돌려 보더라도 그 실체는 내게 남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비실체적인 맥락들만 들락거린다. 광풍(光風)은 ‘비 개인 뒤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말한다. 그냥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크 하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제월(霽月)은  구름에 가려 있다 구름이 걷히면서 환하게 맑아지는 맑게 빛나는 달이란 뜻이다. 얼마나 환한가. 정한수를 장독대 올려놓고 자식 잘되라고 빌고 또 비는 어머님의 마음이 그곳에 닿아 있다.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송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하여 [주돈이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가슴속이 맑아서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개인 날의 달과 같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여기서 시작된 광풍제월이 우리나라 선비들을 그렇게 끝없이 다가가고 싶어하는 세계로 이끄는, 그리움의 바다로 풍덩 빠지게 한 것이다. 광풍제월이 그러하다. 소쇄원이 그렇다. 소쇄원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듣게 하지 않는다. 막연히 거닐면 소쇄원을 느끼게 된다. 전후좌우를 따지거나 높낮이를 보거나 폭포 소리를 찾거나 광풍각이나 제월당에 앉아보거나 어떤 작용에도 소쇄원은 따르지 않고 스스로 순환한다. 그게 소쇄원이다.

그러면서 [나는 소쇄원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할 줄 모른다. 입이 있어도 열리지 않는다. 벙어리다. 그런데 숱한 말을 나비처럼 날린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속적이다. 의도가 있는 듯한데, 어느새 반응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조절하지도 않는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지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떠난 광풍제월의 시간이 없다면 벌써 병들어 신음하며 자리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발길에 채이거나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과 공간을 지녔거나 소쇄원은 그대로 하나이다. 이질적인 성격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지 않는 화해, 화해를 지닌 대립으로 자신을 규정짓는지 모른다.

광풍각과 제월당이 그렇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형제 같지 않다. 형, 동생이라 부르기에도 삼촌과 조카라 하기에도 마땅치 않다.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스스로를 상실한 채 존재한다. 그러나 소쇄원이라는 큰 집 안에서 그저 이 둘은 다정다감한 형제가 되고 만다. 소쇄원이라는 전체가 없다면 광풍각과 제월당을 서로 뜯기어 이산가족처럼 떨어져 살았을 것이다. 다르면서 이어주는 비실체가 열려 있다. 광풍각과 제월당은 스스로 옷을 벗어제꼈다. 그래서 언뜻 마루에 걸쳐 앉기에 민망스럽다. 이내 곧 걸터 앉아 보면서도 머뭇되는 것은 속살을 그대로 내민 채 천연덕스러운 미완의 풍요로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형태가 공간을 규정하고 공간은 형태를 규정할 것일진대 살아 있는 존재원으로서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광풍각과 제월당을 살아 꿈틀대며 역동적이다. 정해진 축 없이 변화의 축을 마음대로 구사한다.

끊임없이 소쇄원을 돌고 돈다. 소쇄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갇힌 셈이다. 인공의 아름다움이란 그곳에 없다. 사람도 인공도 모두 자연 속에서 자연을 풍부하게 하고 만다. 거기에 사람이 빠지고, 인공이 빠지면 자연도 서럽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조화의 기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관계를 맺고 있기에 상황마다 성격으로 다양하게 표출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들을 소쇄원에 쏟아 부었을까.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담아 본다. 고개를 든다. 구름을 걷어내는 바람을 만난다. 환하게 비춰주는 달빛에 머문다. 비로소 나를 찾는다. 나는 광풍제월한가.

(한국주택관리신문,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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